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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19) 세조와 사육신 - 경복궁 정치 1번지 사정전 ①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4-27 16:43:04
  • 기사수정 2019-05-25 23: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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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정전을 감상하고 바로 뒤로 가면 사정전(思政殿)을 만난다. 사정전은 임금이 주요 대신들을 만나서 국가 대사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곳이다. 임금의 집무실로 정치 1번지라고 할 수 있다. 

 사정전은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잃어버리는 것이다. 만 백성의 임금이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착한 사람을 등용할 수 없고 사람답지 않은 사람을 가까이 해서 낭패를 당하는 것은 진실로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전각의 이름을 지은 정도전은 설명했다.

 사정전은 태조 4년(1395)에 지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사정전이 첫 검색되는 것은 세종 6년으로 중국 황제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임금이 근정전으로 가기위해서 사정전을 나오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그 후 사정전을 다시 고쳐 짓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사정전은 태조가 지은 이래 30여 년 간 거의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세종 11년부터 사정전을 본격적으로 이용한다. 세종은 사정전에서 신하들과 거의 매일 만나서 국정을 논하는 상참(常參)뿐만 아니라 중국사신이나 종친, 국가 방위를 위해서 현지로 떠나거나 승리하고 돌아온 장수들을 위한 간단한 연회도 베풀었다. 공놀이의 일종인 구(毬)를 치는 것이나 귀신을 쫒는 의식의 하나인 나희(儺戲)를 구경하기도 했다. 

중전은 이곳에서 양로연을 주최했다. 사대부의 아내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3백 62명이 참석했다. 사정전을 통해서 국가의 평온한 일상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평온함을 뒤흔드는 피 바람이 사정전에 불어 닥친다.


 

세조2년 성균사예 김질과 그의 장인 우찬성(부총리급) 정창손이 “비밀히 아뢸 것이 있습니다”라고 한다. 세조가 사정전에서 이들을 만난다. “좌부승지 성삼문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한 사육신 등 수많은 생명이 사라지는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성삼문은 며칠 전 김질을 자신의 집에 오게 했다. 성삼문은 “혜성이 나타나고, 임금의 음식담당인 사옹방의 시루가 저절로 울었다” “만약 상왕(단종)과 세자가 왕위에 오르기를 다투면 상왕을 보필하는 것이 정도이다” “그대의 장인을 설득해 보라”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성삼문은 우찬성 정창손이 정직해서 정의를 내세우는 데 앞장 설 것이라고 봤다.  


 세조는 숙직군사를 집합시키고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지들을 부르고 성삼문을 사정전으로 잡아 오게 한다. 성삼문은 김질과 대질을 통해서 김질이 밀고한 내용은 그 곡절이 다르다고 했으나 결박을 당하고 곤장을 맞고서 사실을 실토하고 공모자를 밝혔다.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박쟁 등의 이름이 나왔다. 역사에서 사육신이라고 한 이름이다. 이름을 밝힌 자들은 줄줄이 잡혀왔다. 그 실행방법은 박팽년이 밝혔다.

 “어제 세조와 단종이 창덕궁 광연루(정)에서 중국 사신을 위한 연회를 베풀 때 거사를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광연루는 태종이 창덕궁에 지은 것으로 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임금의 경호에는 운검을 차고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무관의 벼슬 별운검이 있다. 어제의 별운검은 성승(성삼문의 부친), 유응부, 박쟁이었다. 자신들과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거사를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세조는 연회 장소인 광연루가 좁다고 해서 별운검을 없애라고 한다. 성삼문은 별운검을 없앨 수 없다고 승정원에 건의했으나 세조는 다시 신숙주에게 건물 내부를 살펴보라고 하고 결국 별운검을 없앤다. 그래서 자신들의 뜻을 이루지 못했고 후일에 임금이 백성의 농사를 살피려 나갈 때 다시 일을 벌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세조가 자신의 장자방이라고 칭했던 최측근 한명회의 신도비에는 광연루의 내부가 좁고 더워서 별운검을 없애라고 자신이 건의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날 별운검 유응부는 바로 행동을 하려고 했다. 무과 출신인 그는 키가 크고 활쏘기를 잘하며 담장을 능히 뛰어 넘었다. “일은 신속하게 처리해야 하고 만일 후일로 미루면 누설될까 두렵다”고 했으나 박팽년 등이 다시 완벽한 기회를 만들자고 해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것이다. 일의 성공과 실패에는 각각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세조는 박팽년에게 자신이 임명한 충청관찰사 자리 등을 거론하면서 “너는 나에게 신(臣)이라 칭하고 녹을 받으면서 다시 배반하였으니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라고 추궁했다. 박팽년은 “나는 일찍이 신하라고 칭하지 않았으며 또한 녹도 먹지 않았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을 조사해 보니 박팽년은 세조에게 장계를 올릴 때 ‘신(臣)’을 쓰지 않았고 녹으로 받은 곡식은 창고에 그대로 쌓아 두었던 것이다. 성삼문과 하위지도 세조에게 받은 녹봉을 받은 날짜를 기록해 두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박팽년은 성삼문 등이 스승으로 모셨던 그의 부친 박중림과 갓 생원시험에 합격한 아들 박순을 포함해서 삼부자가 동시에 단종 복위운동으로 희생된다. 박팽년의 손자는 며느리의 뱃속에 있었다. 며느리는 친정이 있는 대구로 내려갔다. 조정은 아들이 태어나면 죽이라고 명 하였다. 때마침 여종도 임신 중이었다. 박팽년의 며느리는 아들을 낳고 여종은 딸을 낳았다. 여종이 딸을 낳은 것은 천행이었다. 아들과 딸을 서로 바꿔치기했다. 이름을 박비(朴斐)라고 했다. 

박비의 이모부 이극균이 성종 대에 경상도 병마절도사로 내려와서 “네가 이미 장성하였는데 왜 끝내 조정에 숨기는가”라고 해서 자수를 한다. 성종은 특별히 용서하고 이름을 박일산(朴壹珊)으로 고쳤다. 그의 후손 박충후는 선조 대에 태안군수가 된다. 이렇게 해서 사육신 중에서 유일하게 박팽년만 대를 잇게 되었다. 세조는 박팽년을 “당대의 난신이요 후세의 충신이다”라고 평가했다.

 노량진 사육신 공원에 안치돼 있는 사육신 묘. 


하위지는 세종 대에 장원급제를 한 수재다. 세조는 문종 대에 영의정으로서 하위지 등과 같이 군사책인 <병요>를 편찬했다. 세조는 책을 편찬한 후 문종에게 포상을 상주했는데 하위지만이 유일하게 그 명단에서 빼달라고 했고, 또한 취중에 하위지는 “(영의정은) 문종의 자자손손을 진정으로 보필하기를 원합니다”라고 세조를 의심했다. 세조가 왕이 되어 왕의 권한을 강화하는 육조 직할 체제에 대해 하위지가 반대하자 “극형에 처하겠다”고 노발대발했다. 

세조는 하위지의 이러한 직언이 그의 정직함에서 나왔고 자신의 허물을 지적한 것이라고 해서 용서해 준다. 하위지는 예조참판으로서 세조에게 후궁을 권하기도 했다. 대를 이을 왕자를 염려해서다.


 세조가 국문장에서 다시 하위지와 맞닥뜨렸다. 세조는 은밀히 “음모에 참여한 것을 숨긴다면 면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의 재주를 아까워했기 때문이다. 하위지는 소이부답이었다. 세조는 하위지에게 만은 유독 고문을 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는 살을 태우는 잔인한 고문이 있었다. 


 이개는 목은 이색의 증손자로서 세조의 옛 친구였다. 이개는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에 집현전 부수찬으로서 부교리 박팽년, 수찬 성삼문과 함께 참여했다. 후일 길을 달리하는 신숙주도 박팽년과 같이 부교리였다. 이개는 시와 문에 뛰어났다고 한다. 세조가 국문을 할 때 태종이 정몽주를 시험하기 위해서 지은 이방원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를 읊었다. 이개는 “까마귀 눈비 맞아 희난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로 응답했다.


 유성원도 집현전 출신으로서 세자 단종의 시학(侍學)이 된다. 시학은 충직하고 도가 있는 선비로서 세자의 학문적 스승이다. 세조가 주축이 돼서 김종서 세력을 몰아내는 계유정난을 진압했다고 축하하는 하례문을 지어야 했다. 집현전 관원들이 그 글을 짓기 싫어서 모두 도망갔으나 유성원은 당직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 글을 짓고 통곡했다고 한다. 유성원은 일이 탄로 난 것을 알고 집에서 자결을 했다.

 

성삼문은 세조와 함께 계유정난 공신으로 책봉된다. 세조는 1등급, 성삼문은 3등급 공신에 오른다. 그래서 세조와 성삼문은 같은 편으로 보기도 한다. 공신이 되는 것은 본인과 자손에게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성삼문은 자신의 공신이 부당하다고 두 번이나 사양했으나 단종이 받아주지 않는다. 성삼문은 김종서의 전횡은 못마땅하다고 생각했으나 임금을 모시는 데는 세조와 생각이 달랐다. 

성삼문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수레 뒤로 대여섯 살의 딸이 울면서 따라 왔다. “사내자식은 다 죽을 것이고, 너는 딸이니까 살 것이다”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숙종은 선왕의 능을 참배하고 가는 길에 노량진을 지나다가 길옆에 사육신의 묘가 있는 것을 알게 됐다. 숙종은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육신의 벼슬을 복원해주고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제사를 지낸다. 사당을 짓고 그 절개를 가엾이 여긴다는 ‘민절(愍節)’이라는 편액도 내렸다. 235년 만에 사육신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그리고 성삼문의 가난한 외손이 지방에서 제사를 모시고 있음이 알려지자 국가에서 도와준다. 숙종은 비망기도 내렸다. “나라에서 본래 절의를 널리 권장해야 하지만 신하가 가장 어려운 것도 그 절의에 죽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충절이 수백 년이 지나도 늠름하다.”

 

사육신은 육신이 찢어지는 거열형에 처해지고 3일 동안 거리에 효수를 했다. 그 시신을 어떤 스님이 거두어다 묻었는데 김시습이었다고 한다. 사육신의 묘는 서울 동작구 사육신 공원에 안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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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단종복위운동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병자의 난으로 표현하고 있다. 난은 승자의 기록밖에 없어서 위의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연려실기술><동각잡기 상>에 나오는 기록을 종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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