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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조선이야기 (21)수양대군, 거사를 통해 왕위에 오르다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게 된 조선-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전 KBS PD (wan…
  • 기사등록 2020-07-18 20:14:14
  • 기사수정 2020-07-23 17: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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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이 거사하기로 한 단종1년 10월 10일이 다가왔다. 수양대군은 거사 날짜를 미룰 수 없었다. 수양대군은 한명회의 보고를 통해서 안평대군을 지지하는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도 자신들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음을 보고 받았기 때문이다. 

수양대군과 김종서는 서로의 정보가 노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수양대군은 “저들은 회의 3일, 경영 3일, 약속하는 데 3일이 걸릴 것이다. 우리가 정한 10일의 기한이 어그러지지 않으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한명회 등에게 더욱더 입 조심을 당부했다. 거사 8일 전이었다.


 수양대군은 거사하기로 한 새벽에 권남, 한명회, 홍달손을 불러 마지막 점검을 했다. 수양대군은 “오늘 요망한 도적(자신의 바로 아래 동생 안평대군을 지지하는 황보인, 김종서 등)을 소탕해서 종묘와 사직, 즉 나라를 편안하게 하겠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의견을 물으니 모두 찬성했다. 수양대군은 “내가 무사들을 불러 후원에서 활쏘기를 하면서 나의 뜻을 밝히겠으니 너희들은 오후 늦게 다시 오라”고 했다. 


 수양대군은 무사들을 불러 활쏘기를 하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수양대군은 무사들에게 “김종서 등이 권력을 농락하고 안평대군과 몰래 손잡고 반역을 꾀하려고 한다. 내가 이들을 베고 종묘와 사직을 편안히 하고자 한다”라고 자신의 뜻을 밝혔다. 무사들은 수양대군의 의견에 따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실행 방법에서 의견의 차이가 나왔다.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남 등과 논의를 통해서 거사를 한 연후에 임금(단종)에게 알리자고 이미 결정을 했다. 그러나 무사의 다수는 왕에게 자신들의 거사를 먼저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로간의 의견이 분분하자 이탈자도 나왔다. 수양대군은 “불가하다고 주장하는 이가 많으니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의견을 구했다. 


 한명회가 나섰다. 그는 “길 가에 집을 지으면 3년이 지나도 못 짓는다. 작은 일도 이러한데 큰일을 할 때는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미 모의를 결정했다. 의견의 통일을 기다릴 수 없다. 먼저 공(수양대군)이 일어나면 모두가 따를 것이다”라고 의견을 밝혔다. 


 수양대군은 결심을 굳힌다. 그는 말리는 자를 발길로 차고 하늘을 향해 맹세한다. “따를 자는 따르고, 갈 자는 가라. 군사의 움직임은 신속이 생명이다.” 

수양대군이 중문을 나서자 부인 윤씨(정희왕후)가 갑옷을 가져와서 입혀 주었다. 

고려의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궁예의 폭정을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왕건을 밤에 찾아가서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왕건은 단호히 거절한다. 왕건의 부인 유씨는 이 망설임을 보고 손수 갑옷을 가져와서 입힌다. 윤씨와 유씨는 부군을 왕으로 만드는 숨은 조력자다. 

 

광릉(경기도 남양주시). 세조(왼쪽)와 정희왕후(오른쪽)의 능. 조선 왕릉은 42기로 남한에 40기 북한에 2기가 있다. 남쪽의 40기 모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수양대군은 가동 임어을운 한 명만 데리고 홀로 말을 타고 김종서 집으로 간다. 한명회와 권남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내금위 소속 양정 등 3명을 미복차림으로 수양대군을 따라가게 했다. 

 김종서의 집 동네 어귀에 아들 김승규 집이 있었다. 그 집 앞에 무사 3명, 말을 탄 무사 30여 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그들이 김종서를 보호하기 위한 무사들로 여기고 웃으면서 “누구냐”라고 묻자 흩어졌다. 수양대군의 말 한마디에 그들이 쉽게 흩어진 이유는 알 수 없다.  


 수양대군은 김승규를 통해서 아버지를 뵙고자 했고 김종서는 집으로 들어오기를 청했다. 수양대군은 “이미 해가 저물었으니 들어가기는 어렵고 청이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영응대군 부인의 탄핵에 관해서 물었다. 방문의 본질과 관련 없는 질문이었다. 

수양대군은 또 “청을 드리는 편지가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편지를 가져오게 했다. 김종서는 편지를 받아서 달빛에 비추어 보는 중에 수양대군은 임어을운에게 눈짓을 했다. 임어을운은 철퇴로 김종서를 쳐서  쓰러뜨렸다. 아들 김승규가 놀라서 아버지 위에 엎드리니 이번에는 양정이 칼을 빼서 김승규를 쳤다. 수양대군은 이 둘이 죽은 것으로 여기고 김종서 집을 떠나서 돈의문으로 돌아갔다.


 이날 김종서는 자신의 안위를 대비하고 있었다. 김종서는 힘센 장사들을 모아서 밥을 먹이고 병기를 손질하고 있었다. 김종서는 수양대군이 오는 것을 망보게 하고 “사람이 적으면 마중을 하고 많으면 활을 쏘라”라고 지시를 해 두었다. 김종서는 “사람이 적습니다”라는 보고에 자신의 칼을 벽에 걸어두고 빈 몸으로 나왔다. 

수양대군은 자신을 지지하는 무사들을 집에 가두고 홀로 움직였다. 결과적으로 수양대군의 단독행동은 김종서를 방심하게 해서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안평대군은 아들 이우직과 함께 체포돼 강화로 압송됐다. 수양대군은 “너의 죄가 커서 죽이는 것은 마땅하지만 아버지(세종)와 형님(문종)께서 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서를 한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안평대군은 수양대군이 보낸 사자에게 “나 또한 죄가 있음을 안다. 이렇게 된 것이 마땅하다”라고 눈물까지 보였다. 패배자의 회한일 것이다. 

 그러나 안평대군은 압송 도중 그의 종에게 “너는 급히 김종서에게 가서 때를 놓친 실수를 전해주라”라고 몰래 부탁을 했다. 안평대군은 김종서가 이미 변을 당한 것을 모르는 채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고자 했으나 허사였다. 안평대군은 강화에 안치된 8일 후 사약을 받는다. 

 

안평대군은 집현전 학자들이 언문으로 번역한 <운회>를 감독했고 <의방유취>의 감수를 맡았다. <의방유취>는 3년을 거쳐 완성한 365권의 의학서다. 또한 중국 황제가 안평대군의 글씨를 보고 “조맹부의 서체”라고 할 만큼 그는 명필이었다. 하지만 36살로 생을 마감했다. 


 김종서는 다시 깨어나서 자신의 심복 원구를 시켜서 의정부로 하여금 약을 구하게 하고, 안평대군과 연락을 취하며, 내금위를 움직이려고 했으나 모든 것이 막혔다. 김종서는 상처를 싸매고 직접 움직여서 돈의문, 서소문, 숭례문으로 들어가고자 했으나 이 또한 막혔다. 문지기들은 모두 수양대군의 세력이었다. 

김종서는 그의 아들 김승벽의 처가에 숨었다가 결국 죽임을 당한다. 이 외에 황보인 등 10여 명도 철퇴와 칼에 희생을 당하고 김종서 부자와 함께 저자에 효수된다. 

 

김종서는 16세에 등과한 최연소 문과급제자로서 세종과 호흡을 잘 맞추었다. 그는 함길도 감사와 도절제사를 7년 간 맡아서 6진을 개척했다. 우리의 북방영토는 이때 넓혀진 것이다. 세종은 “김종서는 여러 여진족의 항복을 받아서 북방을 안정시켰다”라고 그 공을 높이 평가했다. 

 

역사는 이 거사를 계유정난이라고 부른다. 단종1년(계유년)에 난을 평정했다는 의미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으로 군국의 중요한 사무를 위임받고 군사도 140명 거느린다. 수양대군은 기회를 잡아서 영의정으로 오르고 단종에게는 시련이 시작된다.  

 수양대군은 단종3년 또 다시 기회를 잡는다. 수양대군은 자신의 여섯 번 째 동생 금성대군 이유가 혜빈 양씨, 상궁 박씨, 한남군 이어, 영풍군 이전 등과 함께 난역을 도모한다고 여러 대신들에게 이야기 했다. 조정은 즉각 죄를 물어야 한다면서 단종에게 허락을 받고 이들을 전국적으로 흩어지는 유배를 보낸다. 금성대군은 삭녕으로 유배를 갔다가 결국 사사된다. 

 

단종은 이들을 유배 보낸 후 우의정 한확과 환관 전균에게 “자신은 어려서 나라 안팎의 일을 알지 못하고 간사한 무리들이 난을 도모하는 싹이 종식되지 않는다. 대임을 영의정(수양대군)에게 넘기고자 한다”라고 밝혔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대보를 전하는 것은 경복궁 경회루에서 거행되었다. 수양대군은 엎드려 울면서 대보 받기를 사양했으나 결국은 받는다. 의정부에서는 바로 집현전으로 하여금 단종이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는 선위교서와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즉위교서를 짓도록 한다. 선위와 즉위가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수양대군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른다. 제 7대 세조다.


 세조대는 유독 기이한 현상이 많이 일어난다. 세조가 법주사로 행차할 때 소나무 가지가 스스로 들려졌다는 정이품 소나무, 세조의 등창을 밀어주어서 낫게 한 문수동자와 만남 등이다. 세조실록에는 없는 내용이다. 

 반면 세조실록에 실린 것도 있다. 회암사에 석가여래가 나타나고 사리분신이 수백 개였고 감로가 내렸다(세조10년 5월2일), 원각사에 노란 구름이 퍼지고 하늘비가 꽃피어서 향기가 공중에 가득했다(세조10년 6월19일), 금강산을 순행할 때 선학(仙鶴)이 쌍으로 날아 구름 가에 돌고 산중의 여러 절에 사리가 분신하여 오색 빛을 갖추었다(세조12년 윤3월28일)” 등이다. 


 세조는 형식적으로는 단종으로부터 선위로 왕위를 물려받는다. 그러나 세조는 그 왕위를 위해서 자신의 동생 2명과 조카(단종)를 죽이고 수많은 신하의 생명도 빼앗았다. 


세조대에 일어난 여러 기이한 현상을 통해 세조는 자신의 집권을 어느 정도 정당화시켰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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