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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조선이야기 (20) 한명회, 세조의 장자방이다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게 된 조선-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전 KBS PD (wang…
  • 기사등록 2020-07-11 20:24:02
  • 기사수정 2020-07-14 14: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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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2년 경복궁 사정전에서 아침 조회를 열고 정무를 처리한 후 세조는 동생 임영대군 이구를 비롯한 종친 5명과 한명회만 별도로 남게 한다. 

한명회는 참석자 중에서는 직급이 낮은 우승지였다. 다른 참석자 우찬성 정찬손, 호조판서 이인손, 한명회의 직속상관 도승지 박원형 등 14명은 물러갔다. 

세조는 종친들과 한명회를 위해서 술자리를 마련한다. 

 

이 자리는 중전도 참석했다. 중전은 정희왕후 윤씨다. 세조는 중전과 함께 잔대를 잡고 한명회에게 술을 내린다. 조선시대 임금이 신하에게 직접 술을 내리는 것도 특별한 일이지만 임금과 중전이 동시에 잔대를 잡고 신하에게 술을 내리는 것은 이것이 조선의 유일한 사례가 아닐까 추측한다.


 세조는 다음날 이 사실을 다른 신하들에게까지 자랑한다. “한명회는 다른 공신들과 비할 바가 아니다. 그래서 내가 중전과 함께 술을 내렸다.” 세조가 한명회를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세조는 술자리에서 “한명회는 나의 장자방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세조가 왕이 되고 정치를 펼치는 데는 한명회가 좋은 계책을 내서 큰 도움이 되었음을 압축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세조는 한명회를 왜 자신의 장자방이라고 했는가.  

 

우선 한명회의 어린 시절을 보자. 한명회는 일곱 달에 세상에 나온 칠삭둥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또한 한명회는 배와 등에 별무늬의 검은 사마귀가 있었고 사지가 멀쩡하지 않게 태어났다. 부모는 그런 핏줄을 거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 내버려 둔 젖먹이를 키운 것은 한명회 집안의 늙은 여종이었다. 늙은 여종은 몇 개월 동안 젖먹이를 매우 정성스럽게 돌보았고 한명회는 점차 총명해졌다고 한다. 


 부친이 한명회 14살 때 돌아갔다. 이후 한명회는 호조참판을 지낸 종조부 한상덕 집에서 자랐다. 한상덕은 “이 아이는 범상하지 않은 그릇이다. 반드시 우리 집안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한명회의 떡잎을 일찍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한상덕의 형 한상질(한명회의 조부)은 명나라에 가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받아왔다. 그는 예문춘추관 태학사를 지냈다. 부친 한기는 정6품 승의랑 사헌감찰을 지냈다. 한명회는 소위 뼈대 있는 사대부 집안 출신인 것이다.  


 한명회는 성년이 되면서 체구가 눈에 띌 정도로 우뚝했고 아주 미남이었다. 

서거정의 증언이다. 서거정은 세종 때 과거에 합격을 해서 한명회와는 세조에서 성종까지 같이 활동을 했다. 서거정은 한명회의 묘비명을 쓰기도 했다. 


한명회의 묘 (충남 천안시). 한명회는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으나 세조를 만나서 영의정까지 오르고 그의 두 딸은 왕비가 된다.  사진=네이버이미지



 한명회는 책읽기를 좋아했고 세조에게 장자방이라고 들을 만큼 좋은 계책을 많이 냈으나 과거시험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는 여러 번 과거에 낙방을 했다. 그는 문종 때 음서로 관직에 들어가서 경덕궁직이라는 보직을 맡는다. 그의 나이 38세 때였다. 경덕궁은 태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개성에 살던 사저다. 경덕궁직은 그 집을 관리하는 직책인 것이다. 이때는 이미 조선을 건국한지 60년이 지났고 한양의 경복궁에서 주요 정치를 하던 시절이다. 경덕궁직은 한직이었다.


 그가 한직의 경덕궁직에서 왕실의 종친 수양대군(세조)을 만난 것은 친구 권남이 다리를 놓아주었기 때문이다. 권남은 문종의 명으로 수양대군과 함께 병서를 편찬한 인연이 있었다. 권남은 과거 합격자다.  

 한명회는 권남을 만나서 “임금(단종)은 어리고 권력을 마음대로 하는 대신들이 요직을 차지해서 나라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안평대군이 있다. 반면 수양대군은 똑똑하고 굳세며 사심이 없다”라고 현재의 시국을 진단하고 자신의 안목을 피력했다. 권남은 한명회가 품은 뜻을 세조에게 전달한다. 세조는 권남 말을 듣고 “예로부터 영웅은 처세하기 어렵다. 그 직위가 낮은 것은 상관없다. 내가 비록 그의 얼굴은 알지 못하지만 참으로 뛰어난 나라의 선비다”라고 칭찬하면서 만나고자 하였다. 


 단종1년 한명회가 처음으로 수양대군을 찾아가 뵙는다. 수양대군은 첫 만남에서 한명회를 옛 친구처럼 여겼다. 당시 수양대군의 주변은 권남 외에 뚜렷한 인물이 없었다. 단종 대의 실권자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등 대부분은 안평대군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수양대군은 한명회에게 “임금이 덕을 잃고 좋은 인재를 배치하지 않으면 그로 인해서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나라는 망한다”라고 역대 왕조의 운수를 설명하면서 “그대의 뜻을 알았으니 나를 위해서 좋은 계책을 내라”라고 마음을 열었다. 

한명회는 “어린 임금의 주변에는 정권을 농락하는 사람이 있어서 국가의 화를 초래한다. 안평대군과 그 주변의 대신들이 역모를 꾀하고 있는 것은 길 가는 사람도 다 알고 있다. 이럴 때 충의(忠義)로운 신하가 나타나서 반정을 해서 그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라고 조언을 한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충의로운 신하’로 칭송하면서 반정까지 각오해야 함을 제시한 것이다. 반정도 실패하면 역모가 된다. 

 

한명회는 자신의 주군으로 여길 수 있는 수양대군과 만남을 통해서 그의 진심을 파악했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돕기 위한 행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한명회의 첫 번째 계책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한명회는 종 조득림으로 하여금 안평대군의 종을 비롯한 여러 소인들과 교제를 맺게 한다. 이 정보를 통해서 한명회는 안평대군 집에 출입하는 대신이나 관리들뿐만 아니라 심복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한명회는 그 정보를 근거로 해서 안평대군의 심복 조번을 직접 접촉한다. 

 조번은 연줄을 타고 안평대군에게 접근해서 소릉직의 자리를 얻었다. 소릉은 문종의 비 현덕왕후 권씨의 묘다. 조번은 능지기로 직급은 낮았지만 안평대군의 집에서 노복처럼 일해서 그 집안 내부를 알 수 있었다. 이후 조번은 안평대군의 거사에 대비해서 무기를 관장하는 군기녹사를 맡을 만큼 신임을 얻는다. 

 한명회는 조번을 자주 만나서 사귀었다. 조번은 자신을 알아주는 한명회에게 감격해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이때 쯤 한명회는 거짓으로 안평대군의 사람으로 되고 싶다고 밝혔다. 조번은 스스로의 자만심에 취해서 안평대군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털어놨다. 


조번이 밝힌 정보는 매우 구체적이었다. 조번은 안평대군의 거사에 참여하는 대신들, 군사를 동원하거나 무기를 조달하는 방법, 거사하는 대략의 날짜도 알려주었다. 그는 한명회에게 송두리째 털어놓은 자신의 정보로 인해 계유정난 때 김종서, 황보인 등과 함께 이슬로 사라진다. 

 

한명회의 두 번째 계책은 수양대군에게 힘이 되는 무인들을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양정, 유수, 유하 등이다. 양정 등은 “비록 비천한 무인이지만 수양대군의 대의명분을 듣고 오직 명을 따르겠다”고 맹세를 한다. 

한명회는 자신과 뜻이 맞는 홍달손도 소개한다. 홍달손은 무과 급제자다. 홍달손은 선사포 첨절제사에 해임되어 있었다. 수양대군은 홍달손을 잘 안다고 하면서 “같이 일을 한다면 (거사가)성사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기뻐했다. 이 무인들은 안평대군 세력을 죽이는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집권을 위해서 필요한 정보와 수양대군의 편이 되어줄 인물들을 차분히 끌어들였던 것이다. 수양대군은 한명회의 계책으로 상대편의 정보를 손바닥 보듯이 알았고 자신의 힘이 될 많은 인물들을 얻었다. 이 정도만으로도 수양대군은 한명회를 자신의 장자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권남도 정보 수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권남의 종 계수는 영의정 황보인의 종과 가죽 일을 동업하고 있었다. 황보인의 종은 안평대군의 거사에 대한 것을 권남의 종에게 상세히 알려줬다. 황보인의 종이 알려준 거사 날짜는 10월 12일과 22일을 넘기지 않는 것이었다. 한명회가 조번을 통해서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던 안평대군의 거사 날짜를 권남이 구체적으로 메꾸어 준 것이다. 


 수양대군은 모든 정보를 종합해서 긴급히 한명회, 권남, 홍달손 등을 밤에 불러서 대책을 세웠다. 회의를 종합해서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의 거사를 어린 임금에게 알리지 않기로 했다. 단종 주변의 내시들도 김종서의 사람이었다. 자신들의 정보가 새나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수양대군은 먼저 거사를 일으키고 단종에게는 나중에 보고하기로 결정했다.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이 거사하기로 한 10월 12일보다 이틀 앞선 10월 10일을 거사 날짜로 잡았다. 수양대군은 상대로부터 얻은 정보를 근거로 해서 선수를 치기로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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