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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조선이야기 (19) 정도전의 그늘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게 된 조선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전 KBS PD (wan…
  • 기사등록 2020-07-04 21:46:45
  • 기사수정 2020-07-08 13:3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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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즉위 열흘 후 도승지 안경공과 함께 정도전이 작성한 즉위교서를 검토하다가 깜짝 놀랐다. 

즉위교서에는 조선 건국에 뜻을 달리한 56명의 처벌을 요구했고, 이 중에서 이색, 우현보, 설장수 등 10여 명은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문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태조는 “이색 등을 어찌 극형에 처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죄를 묻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정도전은 물러서지 않고 이색 등의 등급을 낮추어서 죄를 주어야 한다고 다시 요구했다. 태조는 “이색 등은 비록 등급을 낮추더라도 형벌은 가할 수 없다. 두 번 다시 거론하지 말라”고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정도전은 이들 세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장형에 처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태조는 곤장을 맞더라도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기고 마지못해 정도전의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즉위교서는 태조와 정도전의 타협안을 반영해 이색, 우현보, 설장수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서인으로 폐하고 섬으로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이들에게는 형벌을 가하지도 않았다. 그 나머지는 장 100대에서 70대를 때리고 전국으로 흩어지는 유배를 보낸다. 


한 달 여 후 태조의 뜻과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다. 유배 인솔자 손흥종 외 2명은 궁궐로 돌아와서 유배를 간 우홍수, 우홍명, 우홍득, 이종학 등 8명은 병으로 죽었다고 보고를 한다. 특히 우씨 가문이 많다. 

태조는 “장1백대 이하를 맞은 사람이 모두 죽었으니 무슨 까닭인가”라고 무척 화를 냈다. 태조는 이들이 조선 건국에 협력하지 않았지만 죽일 의사가 전혀 없었고 장을 맞더라도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 믿음이 무너진 것이다. 

 

그 내막은 이렇다. 유배 인솔자들이 우홍수 등은 병으로 죽었다고 보고한 것은 거짓이었다. 유배 인솔자들은 우홍수 등 8명을 죽일 의도를 갖고 등짝을 때리거나 목을 졸라 죽였던 것이다. 그들을 죽게 한 것은 정도전이었다. 태종 때에 그 진상은 밝혀진다. 


 태종 11년 손흥종 등은 추국을 받고 “만일 유배자들이 곤장 1백대를 맞아도 죽지 않거든 목을 졸라 죽이라는 정도전과 남은의 지시가 있었다” 라고 과거의 사실을 털어놨다. 조선시대 생사여탈권은 오로지 임금에게 있다. 

정도전, 남은 등은 태조의 뜻과 달리 자신들이 유배자들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사관은 조선왕조실록에 그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정도전은 우씨 가문과 오래 된 원한을 갖고 있었다. 정도전의 외조모가 노비 출신이었다. 우씨 집안은 정도전의 집안 내력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정도전은 고려에서 관리로 임명될 때 제 때 임명되지 않았다. 서경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서경은 임금이 관직을 내릴 때 사헌부에서 임명 동의를 하는 절차다. 정도전은 우씨 집안에서 자신의 집안 내력을 알려서 서경이 늦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도전은 우씨 집안에 대해서 늘 감정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조선으로 시대가 바뀌었다. 정도전은 승자로 권력을 갖게 됐다. 정도전이 극형으로 처하고자 한 우현보는 태조의 보호아래 생명을 보전했으나 그의 맏아들 우홍수를 비롯한 세 명의 자식은 유배를 보내고 매질과 목을 졸라 죽였던 것이다. 그 8명에는 정도전의 스승 이색의 아들 이종학도 포함돼 있다.  


이색 (1328 ~1396년) 영정. 호는 목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삼은으로 불렸다.  사진=네이버이미지 

 




 정도전은 이색도 죽이고자 했다. 목은 이색은 고려와 원나라에서 동시에 벼슬을 한 대유학자다. 정도전은 이색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제자이기도 했다. 

 

정도전은 즉위교서에서 이색을 극형으로 처해야 한다고 했으나 태조의 지시로 유배를 가게 된다. 정도전은 이색을 자연도에 귀양을 보내고자 하였다. 경기계정사 허주는 자연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기 때문에 생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물었다. 정도전은 “섬으로 귀양 보내는 것은 바로 바다에 밀어 넣자는 것이다”라고 이색의 죽음을 암시했다.

 

태조는 정도전의 계획을 알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색의 유배지를 자연도에서 육지 장흥으로 바꾼다. 정도전이 이색을 바다에 밀어 넣자는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이색은 태조의 보호아래 수를 누렸으나 그의 아들은 정도전에 의해서 생명을 단축했다. 정도전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젊은 인재들에게 앙갚음을 한 것이다.


 정도전은 자신을 대신해서 문제 해결을 한 권근을 의심하고 탄핵한다. 태조 6년 정도전은 명나라에 보낸 외교문서 때문에 곤란한 처지에 놓인다. 그 문서에 경박하고 모멸을 주는 글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명은 정도전의 송환을 요구했다. 정도전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정도전으로 인해 조선 조정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 어려움을 해결한 것이 권근이다. 


 권근은 외교문서 작성에 자신도 참여했기 때문에 명에 보내달라고 태조에게 청을 올렸다. 태조는 “그대는 노모를 모시고 있고 황제의 명령이 없기 때문에 차마 보낼 수 없다”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권근은 다시 태조를 설득해서 허락을 받아냈다. 이와 반대로 정도전은 권근은 황제가 의심을 할 수 있으니 보내지 말라고 했다. 사관은 이 모습에 대해서 “권근이 가는 것은 아름답고 정도전을 그르게 여기는 자가 있었다”라고 평을 달았다. 


 권근은 명에 가서 외교문서 문제를 잘 해결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정도전은 권근을 오히려 의심하고 탄핵한다. 정도전은 명으로 간 사신 중에 오직 권근만 살아 돌아왔고 황제가 준 황금을 받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황제는 권근의 말을 듣고 노여움을 풀고 자신의 신하들과 교류도 시키고 시도 짓게 하고 구경도 하게 하면서 옷도 내렸다. 외교문서 문제가 잘 해결된 것이다. 권근 일행은 하직 인사를 하러 갔다. 이날 권근은 황제가 내린 옷을 입었으나 다른 일행은 상복 흰 옷을 입었다. 태조의 현비 강 씨가 붕어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자신이 내린 옷을 입지 않은 것에 화를 내서 권근은 조선으로 돌려보내지만 나머지 일행은 국문을 해서 죽인다. 황금은 태조가 노자로 사용하라고 몰래 주었던 것을 정도전은 황제가 내린 상으로 넘겨짚었던 것이다. 


 태조는 정도전에게 “황제의 진노를 풀고 그대를 다시 부르지 않으니 나라에 공이 있고 그대는 은혜를 입었다. 나는 상을 주려 하는 데 그대는 오히려 죄를 주려 하는가”라고 하자 정도전은 감히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권근은 이 외에도 정도전의 문집 <삼봉집>에 글을 써 주는 등 정도전에 협력했다. 정도전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도와주었던 권근을 오히려 의심하고 탄핵을 한 것이다.

 

정도전은 <고려사>도 왜곡한다.  태조 4년 정도전과 정총은 태조의 명을 받아서 고려의 왕건에서 공양왕까지 37권의 고려사를 편찬해서 바친다. 그러나 이 고려사는 이후 몇 번의 수정을 거쳐야 했다.


 그 처음은 태종 때다. 태종은 “고려사의 우·창왕 이후는 사실과 다르다”라고 하윤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고려사를 다시 찬정하라고 한다. 태종도 고려사를 보고 “고을을 잘 다스린 자는 오직 정운경 한 사람 뿐이다”라고 사람들을 오해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정운경은 정도전의 부친이다. 태종은 정도전이 고려사에서 자신의 부친을 지나치게 미화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 다음은 세종 때다. 세종은 신하들과 경연에서 “고려사의 공민왕 이후는 정도전이 겪은 것을 보태고 빼고 했다. 사관이 쓴 초고와 같지 않는 곳이 매우 많다. 이것을 어찌 후세에 전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정도전이 편찬한 고려사는) 없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면서 여러 차례 걸쳐서 수정을 하게 한다. 


고려사는 문종 대에 완성된다. 고려가 자신의 손으로 고려사를 완성하지 못하고 조선에 맡겨진 것은 역사의 불행이다. 또한, 고려사는 정도전에 의해 더욱더 왜곡되어서 전할 뻔 했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의 세력에 의해서 정도전, 남은, 심효생, 박위, 유만수는 당일 죽임을 당한다. 사관은 모두 그들의 졸기를 남겼고 인물평도 했다.

 유만수의 인물평은 없다. 남은은 “천성이 호탕하고 비범해서 공공에 해를 끼치지 않았다”, 심효생은 “무기제조를 매우 정교하게 했다”, 박위는 “여러 번 왜구를 공격해서 그 지략이 뛰어났다” 라고 세 사람의 장점만 기록돼 있다.


정도전은 장·단점 모두 기록돼 있다. 장점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해 많은 책을 읽었으며 후배들을 가르치고 이단을 배척했다”라고 돼 있다. 단점은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다. 또한 겁이 많아서 자신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이기고자 했으며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였다”로 기록해두었다.


 필자는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정도전의 학문, 업적과 다른 그의 행동을 보고 매우 곤혹스러웠다. 이 글을 써야 할지를 망설였다. 그러나 정도전의 그늘을 드러내기로 했다.

 세종은 역사를 매우 중시했다. 세종은 자신의 말은 모두 사관이 기록하게 했고 신하들의 상소나 보고서도 사관이 먼저 기록한 후에 자신에게 올리라고 했다. 또한, 세종은 입시하는 사관을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려 조정의 의논을 빠트리지 않도록 했다. 

 필자는 역사를 올바르게 기록하고자 한 조선의 기록 정신을 외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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