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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조선이야기 (13) 태종, 영의정부사 심온을 벌하다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게 된 조선 -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전 KBS PD wan…
  • 기사등록 2020-05-23 20:30:57
  • 기사수정 2020-05-26 17:4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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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 즉위년 1418년 9월 8일 세종의 장인 심온에게는 생애 최고의 날이었을 것이다. 그는  중국에 사은사로 가기 위해서 연서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연서역은 한양에서 북으로 가는 첫 번째 역참이다. 


 심온은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 사위 세종, 중전 등이 보낸 환관들의 전송을 연서역에서 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장안이 텅텅 빌 정도로 백관들도 나와서 전송을 했다. 심온은 이미 태종과 세종으로부터 궁궐에서 전송을 받고 말 한 필, 옷과 가죽 신 등도 하사를 받았다. 그의 영광과 위세가 어느 정도인가를 설명해준다. 


 그의 신변에도 최근 3개월 동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심온은 사위 충녕대군이 세자가 돼서 왕위에 올랐고 그는 임금의 장인으로서 청천 부원군이 되었다. 그의 벼슬도 이조판서→의정부참찬→영의정부사로 올랐다. 영의정부사는 조선 초기 최고의 관직이다. 

오늘날로 보면 장관→부총리→총리가 3개월 만에 이룩된 것이다. 그의 나이 44세 때였다. 


 그는 11살에 고려의 감시(監試)에 합격할 정도로 수재였지만 초고속 출세이다. 감시는 고려 국자감에서 진사를 뽑는 시험이다. 


 그러나 심온에게 불어 닥칠 엄청난 태풍의 눈이 형성되고 있었다. 심온은 그 사실을 모른 채 부사 이적 및 박신 등과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심온이 중국으로 떠나기 며칠 전 병조참판 강상인과 좌랑 채지지를 우선 체포해서 의금부에 가둔다. 그 다음날 병조판서 등 병조의 핵심관료 대부분도 의금부에 가둔다. 

태종은 의금부 책임자 유정현에게 “(병조가) 군사의 일을 (상왕인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는 이유를 파악하라”라고 지시를 내렸다. 태종은 형조· 사헌부· 사간원도 합동심문에 참여하게 했다. 조선 초기 이 세 부서는 삼성(三省)이라고 해서 모두 간언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태종은 갓 부임한 병조판서 박습은 그대로 두고 병조참판 강상인에게는 고문까지 허용했다. 태종과 강상인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30년 지기였다. 태종이 사안을 매우 중대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 “내가 군사의 일은 친히 청단하겠다. 이것은 왕위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임금에게 무슨 일이 있을 경우에 대비하는 것”이라고 군사권을 넘겨주지 않았다. 태종은 최근 병조가 군사의 일을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의금부는 심문 후 “병조 관리들이 사리를 잘 살피지 못했다”라고 보고했다. 태종은 강상인은 원종공신임으로 용서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옛날을 생각해서 죄를 주지 않는 것이니 반성하라”라고 덧붙였다. 

 태종은 병조의 간부들도 속장에 처했다. 속장은 장형의 숫자에 따라서 돈을 대신 내는 벌이다. 사안의 중대성에 비해서 비교적 가벼운 처벌로 그쳤다. 병조는 앞으로 군사의 일은 “상왕에게 먼저 보고해서 허락을 받은 후 임금에게 아뢰겠다”라고 업무 개선을 보고했다. 


 태종이 처벌하고 병조의 업무도 개선했지만 사간원·사헌부·형조는 가만있지 않았다. 삼성은 ‘상왕에게 군사권이 있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데 이를 실천하지 않은 것은 ‘불경죄’에 해당해서 ‘가벼운 처벌로 그쳐서는 안 된다’라고 합동 상소를 계속 올렸다. 임금에 대한 불경죄는 사안에 따라서 사형에 처할 수도 있다. 


 세종은 상왕의 허락을 받아서 강상인은 관노비로 전락시켜서 함경남도로 보내고 박습을 비롯한 다른 병조 관리들은 지역으로 유배를 보냈다. 강상인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2개월 후 태종은 이 문제를 다시 끄집어낸다. 태종은 강상인이 군사의 일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자신의 명령을 어긴 것은 “딴 마음을 품고 장차 뒷날을 준비하는 것이다”라고 모반까지 언급하면서 압슬형을 해서라도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요구했다. 압슬형은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 무릎에 무거운 물건을 올려놓는 고문이다. 압슬형으로 죽는 사례도 많았다. 영조 대에 폐지되었다. 


 의금부 관원을 지역으로 파견해서 강상인과 병조의 관리들을 서울로 다시 잡아 온다. 

 강상인은 “나는 30년 동안 원종공신이었다. 어찌 다른 마음이 있겠는가. 다만 일을 잘 처리하지 못했을 뿐이다”라고 자신을 변호하고 “국가의 명령은 한 곳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지론이고 이것은 상관 박습도 “동의했다”라고 진술했다. 그가 말한 한 곳은 상왕이 아닌 현재의 임금 세종이었다. 

 그는 아울러 심온과 그의 동생 심정, 장천군 이종무, 좌의정 이원, 이조참판 이관, 전 총재 조흡 등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끌어들였다. 

 이종무는 강상인과 대질해서 무고라는 주장을 펼쳤고 이원 등은 자신들이 말한 한 곳은 상왕이라고 진술했다. 태종은 이들의 진술을 받아들여서 풀어주었다.

 

그러나 심정과 이관은 거듭 압슬형을 받고서 “심온은 군사는 마땅히 한 곳에서 명령이 나와야 함을 말했다”라고 진술했다. 여기의 한 곳은 상왕이 아닌 세종 임금이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가 있는 심온에게 불똥이 튄 것이다. 


 태종은 병조참판 이명덕에게 “정상이 밝혀졌다. 더 이상 심문할 필요가 없다. 주모자는 심온이다. 그의 당파 강상인과 이관 등을 극형에 처하라”라고 지시를 내렸다. 모반죄로 본다는 의미다. 

 태종이 강상인의 일을 다시 끄집어 낸 이유가 있다. 태종은 그동안 들은 것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죽기 전에 “간악한 사람을 제거해야겠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태종은 강상인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었다. 

 


영릉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능)

심씨는 뜻하지 않게 세자빈과 왕비가 되었으나 아버지는 모반죄로 자결해야 했으며 어머니는 관노비로 전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세종은 왕비의 아픔을 보듬으려고 노력했다. 사진=네이버이미지



태종은 의금부의 보고를 받고 서둘러서 형량을 정한다. 

 심온은 중국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우선 그의 가산을 봉하게 한다. 심정, 이관 등은 참형에 처한다. 심온의 다른 형제들, 조카, 서자 등은 전국에 뿔뿔이 흩어지는 유배를 보낸다. 강상인은 백관들이 보는 앞에서 거열형에 처한다. 거열형은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매어서 사지를 찢어 죽이는 극형이다. 


강상인은 수레에 올라서서 “나는 죄가 없다.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다”라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사라졌다. 심온이 천거한 사람들도 나중에 모두 파면을 당한다. 

 

심온은 임금의 장인으로서 만인지상 영의정에 올라 극진한 예우를 받고 중국의 사은사로 갔으나 이제는 자신도 모르는 채 모반자가 되었다. 심온은 더군다나 대질해서 자신을 변호할 상대도 없다. 조정은 중국 사신과 함께 돌아오는 그를 비밀리 체포해서 압송하는 논의를 하고 있었다. 심온에게 칼을 씌우고 수갑을 채우는 것도 허락했다. 


 심온은 강상인 등이 이미 죽어서 대질을 할 수도 없고 자신에게 압슬형까지 가하자 ‘죄를 벗어날 수 없다’라고 체념했다. 

그는 “강상인 등이 진술한 것을 인정한다. 무인으로서 병권을 잡아보자는 것뿐이었다”라고 진술했다. 그를 변호하고 힘이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종도 진상 조사의 중간보고를 받고 심온을 변호했으나 태종은 자신이 들은 것과 다르다고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온은 태종의 명에 의해서 다음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심온의 졸기를 보면 “그는 성품도 인자해서 세상인심에 거슬리지 않았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풍해도 관찰사로서 백성의 편에서 일을 했고, 좌정승 하윤이 뇌물을 받고 대낮에 첩의 집을 드나들자 비판을 했으며, 자신의 사위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자 “앞으로는 손님을 사절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야겠다”라고 근신의 뜻도 밝혔다. 


 심온은 좋은 평판에도 불구하고 모반죄로 연루되어서 생명을 단축했다. 그가 모반을 하기 위해서 세력을 모아서 계획을 세우고 행동으로 옮긴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강상인도 고문으로 인해서 거짓 진술을 했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군사의 명령은 한 곳에서 나와야 한다.’는 말 한마디가 모반죄로 엮어졌다. 심온이 모반을 한 증거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심온은 강력한 왕권을 주장하는 태종의 시대에 살았고 임금의 외척이 되었다. 세자 양녕의 외척 민무구 형제도 마찬가지였다. 심온과 민무구 형제는 태종이 준비하는 다가올 시대에 부담스러운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조선 후기 외척의 발호로 국가가 흔들리는 과정과 비교를 하면 태종의 단호한 조치를 역사는 평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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