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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조선이야기 (12) 태종의 두 번째 전위와 세종의 탄생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게 된 조선-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전 KBS PD wang…
  • 기사등록 2020-05-16 22:27:21
  • 기사수정 2020-05-18 16:2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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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 18년 8월8일 임금은 지신사 이명덕, 좌·우부대언 원숙과 성엄을 경복궁 경회루로 불렀다. 지신사와 좌·우부대언은 조선초기의 직명으로 각각 승정원의 도승지(비서실장)와 승지(비서)에 해당한다. 


태종은 “나는 18년간 재위해서 불의를 행하지는 않았지만 물난리와 가뭄 등 천재지변이 있고 나 자신도 묵은 병이 있다. 세자에게 전위하려한다. 더 이상 간쟁하지 말라”라고 말했다. 

 이명덕 등이 “옳지 않습니다”라고 반대 하자 태종은 다시 “18년 동안 호랑이 등을 탔으니 이 또한 충분하다”라고 자신의 심정을 압축해서 설명했다. 

이명덕 등은 울면서 조정 대신들에게 왕의 뜻을 알렸다. 

 

경복궁 경회루(국보 제224호). 태종은 경회루에서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줄 뜻을 밝혔다. 단종도 이곳에서 세조에게 대보를 물려준다. 사진=왕현철 

 


영의정 한상경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전하는 아직 건강하고 백성은 평안하고 물건은 풍족하며 왜적들이 복종하는 오늘날처럼 태평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왕을 칭송하고 거부의 뜻을 분명히 했다.


 태종의 뜻도 확고했다. 태종은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 줄 대보(大寶)를 가져오게 했다. 약 2개월 전 양녕세자에서 바뀐 충녕세자는 급히 명을 받고 허둥지둥 달려왔다. 조정대신들은  다시 한 번 간절히 명을 거둘 것을 청했다.

 태종이 “아들아, 대보를 넘겨주니 받아라”라고 하자 세자는 엎드려서 안절부절 못했다. 태종은 세자를 일으켜 세우고 대보를 넘겨주고 나가버렸다. 태종은 아울러 임금이 햇빛가리개로 쓰는 붉은 빛깔의 홍양산도 내렸다. 


 태종은 북두칠성을 가리키면서 맹세를 하고 “이제 복위는 없다”라고 내선(內禪)을 바꿀 수 없음을 승전색을 통해서 조정대신들에게 전하게 했다. 

내선은 임금이 세자에게 양위는 하였으나 즉위의 예를 올리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승전색은 임금의 말씀을 전하는 내관의 직책이다. 


 세자는 두려워하면서 “어찌할까”라고 지신사 이명덕에게 물었다. 이명덕은 “전하의 뜻은 이미 정하여졌음으로 효도를 다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고 내선을 받아들일 것을 권했다. 

 대간을 비롯해서 의정부, 육조, 개국·정사·좌명의 삼공신, 삼군도총제부, 문무백관, 그리고 성균관 유생들까지 거의 모든 조정이 나서서 내선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태종은 아예 뜯어보지도 않았다. 

또한 임금이 문을 닫고 만나주지를 않자 조정 대신들은 궁궐의 뜰을 진동시킬 만큼 통곡을 했으나 더 이상 상소는 올리지 않았다.

 

태종이 다음 날 왕위를 물려주고 충녕은 세자가 된 지 2개월 만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한다. 조선의 제 4대 세종의 탄생이다. 

 

태종의 두 번째 전위에서 세종의 즉위까지는 사흘 밖에 걸리지 않았다. 태종의 첫 번째 전위는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 거의 4년 동안 팽팽한 줄다리기를 했고 민무구 형제를 비롯한 많은 생명도 빼앗았다. 

이에 비해 두 번째 전위는 신하들의 극심한 반대도 없이 순조로웠다. 


 차이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약 2개월 전 세자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삼는 과정을 보면 더욱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양녕은 태종의 맏아들로서 태종 4년 10살에 세자로 책봉돼서 14년 간 세자로 있었으나 태종 18년 쫓겨난다. 

세자가 쫓겨나는 결정적인 계기는 세자가 손수 쓰서 왕에게 올린 글이었다.  세자는 “전하는 시녀를 궁중에 들이는데 신의 첩은 궁궐에서 내보내서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합니다. 한나라 고조는 재물을 탐내고 색을 좋아했으나 천하를 평정했습니다. 반면 진왕 광은 어질다고 칭송을 받았으나 나라가 망했습니다. 신의 첩 하나를 궁중 출입을 금하는 것은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많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또한 “(자신의 애첩 어리를 보호하려다가 유배를 간) 장인 김한로의 처벌이 지나치고, 세자빈 김 씨가 임신을 했음에도 (죄인의 딸이라) 죽조차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변고가 있을 수 있다”라고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고 왕에 대한 원망을 쏟아냈다.  


 태종은 세자의 글을 여섯 명의 대언과 답서를 쓸 예조판서 변계량, 세자의 스승을 겸하고 있는 영의정과 좌의정 등에게도 보여주었다. 조정 대신들은 세자의 글을 자연스럽게 읽게 됐고 ‘망령된 글’이라고 하면서 바로 세자를 폐하도록 요구했다. 

 

세자의 글이 바로 폐세자의 도화선으로 연결된 것은 그동안 세자의 자질을 의심케 하는 행동도 빌미가 됐다. 

 양녕은 학문을 게을리 했고, 궁궐 담을 무시로 넘나들어서 애첩 어리나 창기에 빠지는 음란한 행동을 보였고, 왈짜패들과 어울려서 오락을 즐기는 등 세자의 본분을 벗어나는 행동을 여러 차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세자의 행동이 고쳐지기를 바라면서 세자 주변의 무리들을 죽이기도 했다. 또한 훌륭한 스승의 교육과 세월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졌으나 모두 무너져 내렸다.

 태종은 조정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양녕세자를 폐하고 경기도 광주로 보낸다. 

이어 세자를 뽑기 위해서 왕과 신하가 머리를 맞댔다. 왕은 내전에 있고 신하들은 조계청에 모였다. 조계청은 현재 창덕궁에서 유일한 청기와 지붕을 갖고 있는 선정전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이 날의 참석자 영의정 유정현을 비롯해서 40명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임금과 신하들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은 지신사 조말생이다. 


 태종은 뜻을 전했다. “적장자를 세자로 세우는 것은 고금의 법이다. 양녕은 두 아들이 있다. 다섯 살과 세 살이다. 이 아들을 세자로 세우고자 한다.” 

 우의정 한상경을 비롯해서 대부분은 왕의 뜻에 찬성을 했다. 다수 의견이다. 양녕의 맏아들 다섯 살이 세자가 될 수 있었다. 

 영의정 유정현은 반대 의견을 낸다. “신은 배우지 못해서 옛 고사를 모릅니다. 일에는 따라야 할 법도와 도리가 있습니다. 어진 이를 골라야 합니다.” 

공조판서 심온을 비롯해서 15명은 유정현의 의견에 찬성을 했다. 소수의견이다.

 

좌의정 박은은 “아버지를 폐해서 그 아들을 (세자로) 세우는 것이 고금의 법에 있다면 적장자를 세자로 해야 하지만 고금의 법에 없다면 어진 이를 선택해야 합니다”라고 조건부 어진 이를 주장했다.   

 이조판서 이원은 거북점과 시초점을 제시했다. 거북점은 거북 껍질로, 시초점은 톱풀로 치는 점이다. 이 둘은 시귀(蓍龜)라고 해서 고대 중국에서 사물의 길흉을 판단하는 신물(神物)로 여겼다. 

 

태종은 조말생에게 조정 대신들의 의견을 보고 받고 “점을 치겠다”라고 결정을 했다. 조말생은 왕의 결정을 신하들에게 전달했다.

 태종은 조말생이 나간 후 ‘어진 이를 고르라’는 소수 의견에 대해서 왕비의 생각을 물었다. 왕비는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것은 화란의 근본입니다”라고 반대를 했다. 왕비는 양녕의 아들을 고르라는 뜻이다. 


 태종은 다시 생각에 몰두해서 ‘어진 이를 고르는 것이 마땅하다’라며 조금 전 ‘점을 치겠다.’고 한 결정을 번복한다. 

사관은 태종의 이 결정을 ‘한참 만에 곧 깨달았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태종은 다시 전지를 내린다. “나의 결정을 바꾼다. 어진 이를 골라서 아뢰어라.”

 유정현 등은 “아들과 신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임금입니다”라고 다시 왕에게 공을 넘겼다. 



창덕궁선정전 (보물 제814호) 태종 때 조계청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세자 양녕를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결정한다. 사진=우리궁궐지킴이 제공  

 


태종은 결론을 내린다.

 “둘째 효령대군은 자질이 미약하고 그저 빙긋 웃기만 할 뿐이다. 셋째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해서 밤새도록 글을 읽는다.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에도 몸짓과 언어동작이 모두 예에 부합한다. 충녕은 술은 무익하다고 하면서도 손님을 즐겁기 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마신다. 효령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다. 충녕은 대위를 맡을 만 하다. 충녕을 세자로 정하겠다.”


 유정현 등은 “신 등이 어진 이를 고르자는 것은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입니다”라고 맞장구를 쳤다. 창덕궁 선정전에서 충녕세자가 탄생된 것이다. 

 

조정 대신들은 이전부터 충녕을 눈에 들어 했다. 여러 대신들은 충녕에 대해 ‘정직하다’‘덕이 있다’라고 모시고 싶어 했고, 중국 사신 황엄은 “충녕은 부왕처럼 지혜롭고 총명하다. 장차 왕위를 물려받을 것이다”라고 예측했다. 보석은 나서지 않아도 빛나는 법이다. 

 

 태종의 두 번째 전위가 순조로웠던 것은 이처럼 충녕이라는 확실한 대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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