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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된 청와대가 담고 있는 수많은 역사 이야기 - 왕현철 전 KBS PD/ 왕PD의 토크멘터리 <조선왕조실록>저자
  • 기사등록 2022-05-15 08:18:00
  • 기사수정 2022-05-20 14:4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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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산(북악산), 청와대, 경복궁이 일직선상으로 한 눈에 들어온다. 청와대는 고려에서 현대까지의 역사가 아우러져 있다. 사진=왕현철 




5월 12일 화창한 날 청와대 개방의 행운을 얻었다. TV화면을 통해서 익숙했던 장소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진 비경을 구석구석 돌아볼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잘 다듬은 자연의 조화로운 모습으로 눈은 정화되는 느낌이었고 나무와 꽃, 풀로 잘 아우르진 숲의 속삭임으로 귀는 청량했다. 


 청와대 이름은 건물로 얻은 것이지만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곳곳에서 자연과 유적들이 은근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청와대 개방으로 누린 시간은 황홀함 그 자체였다.


 청와대는 푸른 기와집의 뜻으로 대한민국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이 정했다. 청와대와 화령대 두 개의 후보에서 청와대를 선택했다고 한다. 

이후 청와대는 우리나라 대통령이 머무는 정치공간으로 자리매김을 했고 제19대 문재인 대통령까지 이어져 왔다. 

 

제20대 윤석열 대통령이 탄생하면서 청와대는 이제 대통령의 정치공간에서 국민의 산책공간으로 바뀌었다. 이곳에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청와대 터를 처음으로 주목한 것은 고려 숙종이었다. 고려의 위위승(종6품) 김위제는 수도 개경뿐만 아니라 남쪽에도 수도를 정해서 계절에 따라서 왕이 머물기를 청한다. 

 그가 추천한 곳이 현재의 청와대 터였다. 

<도선비기>에서 청와대는 오덕을 갖춘 땅이라고 여겼다. <도선비기>는 우리나라 풍수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도선이 지은 풍수서이다. 


 숙종은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고(숙종6년, 1101년) 문화시랑평장사 최사추 등으로 하여금 현재의 청와대가 도읍지로서 적합한 지세를 갖추고 있는지 살펴보라고 지시를 하고, 종묘와 사직, 산천의 신령들에게 고하고 궁궐을 짓는다.


  “남경의 궁궐이 완성되었다.” <고려사 숙종9년 5월 을유일>

 숙종은 4년여에 걸쳐 궁궐을 완성하고 남경으로 행차를 해서 머문다. 숙종은 후궁들과 함께 정자와 동산을 돌아보았고, 전국 관리들의 하례를 받았으며, 송나라 사신이 가져온 토산물을 받기도 했다. 

남경의 정전인 연흥전에서 반야도량을 사흘 동안 열기도 했다. 불교를 중시한 고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숙종이후 고려의 여러 왕들도 남경에 머물렀다. 

 

두 번째로 이곳을 주목한 이는 조선 태조 이성계였다. 태조는 1392년 7월 17일 고려 수도 개경의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당시의 직책은 권지고려국사였다. 권지는 임시벼슬이라는 뜻이다. 

 

 “나라 이름은 그전대로 고려라 하고, 의장과 법과 제도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에 의거하게 한다.” <태조실록 1년 7월 28일 즉위교서>

 태조는 고려의 국새를 받고 고려의 국사로서 즉위를 하고 고려의 제도를 이어간다고 밝혔다. 태조는 급격한 변화를 바라지 않았으나 고려의 수도, 개경은 물려받고 싶지 않았다. 수도를 옮기고자 한 것이다.

 

태조는 수도를 옮기기 위해 계룡산과 무악(서울 서대문구)의 두 곳을 답사해서 수도를 정하고자 했으나 최종적으로 이곳을 낙점했다. 태조는 땅이 뻗어나가는 모습이 좋고 국토의 중심으로서 백성들이 편리할 수 있다고 보았다. 

 태조는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해서 정도전 등으로 하여금 다시 살펴보게 하고, 여기보다 아래의 평탄하고 넓은 곳을 궁궐터로 정한다. 현재의 경복궁이다. 

청와대는 경복궁의 후원이 된다. 


청와대 본관에서 본 경복궁 신무문과 서울시내. 본관 앞의 너른 마당, 신무문의 북쪽에는 조선시대 ‘회맹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사진=왕현철 



 청와대는 경복궁 후원으로서 조선 왕들의 이야기가 남아있다. 이곳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태종 때였다. 

 태종은 후원에 회맹단을 설치했다. 회맹단은 경복궁의 북문, 신무문의 북쪽에 설치한 것으로 봐서 현재 청와대 본관 앞의 너른 터에 설치한 것으로 추정한다. 

 회맹은 임금과 공신들 사이에서 삽혈동맹을 맺는 것이다. 삽혈동맹은 산 짐승을 잡아 쟁반에 피를 받아서 마시고 입술을 벌겋게 함으로서 참가자들끼리 서약을 반드시 지킨다고 신에게 맹세하는 일이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기 전까지는 태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등 여러 왕이 이곳에서 삽혈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임금과 군신 간의 삽혈동맹이 반드시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김종서를 죽이는 계유정란으로 공신과 영의정부사에 오른 수양대군 등에게 단종이 내린 회맹서약을 보자.

  “신하들은 초심을 잊지 말고 왕실을 보호하고 절의를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 이 맹세를 어기면 반드시 신명이 죽일 것이다. 이 맹세를 마음에 간직하고 끝까지 변하지 말라.”<단종실록1년 11월 20일>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삽혈동맹으로 충성을 맹세했지만 결국 왕위에 올라서 조카 단종을 쫓아내고 목숨까지 빼앗았다.

 

세종은 후원에 논밭을 만들어서 농사체험을 하고 지역에 부임하는 관리들에게 그 체험담을 들려주었다. 

  “비록 가뭄이 와도 정성을 다하니 풍년의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한 지방을 맡았으니 마음을 다해서 힘쓰라.” <세종실록 21년 12월 24일/ 세종실록 23년 12월 17일>

 세종이 후원에서 한 농사체험은 지역으로 부임하는 관리에게는 약이 되었을까? 아니면 ‘내가 해봐서 아는데’처럼 압박이 되었을까? 현재의 청와대도 보리가 심어져 잘 자라고 있었다. 

 

세종의 맏아들 문종은 왕으로서 재위기간은 2년 3개월로 짧았으나 세자를 무려 30년 동안 했다. 그는 병치레가 잦았던 부왕을 대신해서 대리청정도 했다. 세종의 몸이 불편하면 세자 문종은 친히 복어(鰒魚)를 베어서 수라에 올리거나 자신이 직접 후원에 심은 앵두를 따서 드렸다.

  “외부에서 가져 온 앵두가 세자가 손수 심은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문종실록 2년 5월 14일>

 세종은 세자가 올린 것을 맞보고 눈물까지 흘리기도 하였다. 그래서 조선에서 앵두는 효자나무로 불렸다. 문종이 직접 심은 앵두가 청와대의 어느 곳에서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수양대군에서 왕위에 오른 세조는 후원을 군사훈련장으로 활용했다. 세조는 <병정> <역대병요> <진서법(오위진법)> 등 군사에 관한 책을 직접 편찬했을 정도로 군사훈련을 통한 국방력 강화를 매우 중시했다. 후원에서 활쏘기 대회나 진법 훈련을 가장 많이 한 왕으로 기록돼 있다. 그는 사냥도 군사훈련의 하나로서 자주했다.

 

후원에는 호랑이도 나타났다. 백악산으로 연결됐기 때문이다. 세조는 군사들로 하여금 호랑이 몰이를 시키고 직접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임금(세조)이 백악산에 올라갔는데 호랑이가 낭떠러지 골짜기에 숨었음으로 활을 쏘아서 잡았다.” <세조실록 13년 11월 19일> 

 세조가 백악산 등에서 호랑이를 잡아서 환궁한 기록은 여려 차례 나온다. 조선시대 호랑이는 후원에도 출몰할 만큼 그렇게 낯선 존재는 아니었다. 인간의 지나친 간섭으로 이제 한반도에서 자연속의 호랑이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오운정(이승만 전 대통령 때 지은 것으로 추정함). 사진=왕현철 



중종은 외교무대로서 후원을 활용했다. 

 중종13년 중국 황제의 서명이 들어간 <대명회전>에 조선의 역사가 잘못 기록된 것을 알았다.

  “태조 이성계가 이인임의 후예로서 (고려)왕 씨의 네 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태조가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있었던 이인임의 자손이라는 것도 맞지 않지만 고려 네 명의 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것도 조선의 역사와 부합하지 않았다. 


 중종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했다. 중종은 중국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서 개정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종은 자신이 직접 중국으로 가서 개정 요청을 하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답답했으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19년이 지난 후 <대명회전>의 수찬을 겸하고 있는 중국 사신이 온다. 중종은 천재일우의 기회로 판단한다. 중종은 이들을 경회루에 초청해서 공식적으로 <대명회전>의 개정을 요청하고, 후원을 거닐면서 낮은 자세로 온갖 노력을 다했다. 


 47년이 지난 후 <대명회전>의 개정된 내용을 선조가 확인했다. ‘이성계는 이인임의 후예가 아니고, 고려 네 명의 왕을 살해하지 않았다’라고 중종이 개정을 요구한 그대로였다. 

이것을 ‘종계변무’라고 한다. 조선 종계의 무고함을 따져서 명백하게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경복궁 후원도 그 일익을 담당한 것이다.  

 

슬픈 역사도 있다. 명성황후가 경복궁 건청궁에서 일본의 무사들에게 살해된 것은 조선 명멸의 참담한 대목이다. 그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것은 더할 나위도 없다. 

  “대대장 우범선, 이두황에게 청하여 (명성황후의) 타고 남은 유해에서 하체를 거둬 모아서 오운각 서쪽 봉우리 아래에 몰래 묻었습니다.” <승정원일기 고종32년 11월 14일>

 오운각은 고종 초기 경복궁 후원에 지었다. 오운(五雲)은 다섯 색깔의 구름으로 상서롭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또한 임금이 있는 곳을 비유하기도 한다. 그 아래 황후의 시신이 버려졌다는 것은 비극의 극치다. 오운각의 정확한 위치 기록이 없어서 아쉽다. 

 

오운정은 청와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정자다. 청와대의 뒤쪽 위에 있다. 

원래는 아래쪽에 있었으나 1989년 대통령 관저를 새롭게 지으면서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언제 지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인장 ‘이승만인(李承晩印)’과 ‘우남(雩南)’이 왼쪽 아래에 새겨져 있어서 이승만 전 대통령 때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이름도 고종 때의 오운각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일명 ‘미남불’). 사진=왕현철 



오운각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면 속칭 ‘미남불’이 나온다. 정식 이름은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으로 보물이다. 

 불상은 일제강점기 때 경주 남산의 사찰(이거사로 추정)에서 처음 발견됐고 1917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에 사진이 실리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남산에 있는 조선총독부 관저로 옮겼다. 1939년 조선총독부 관저를 청와대에 새로 지으면서 불상은 다시 옮겨 현재의 장소에 모셔졌다.


 안내판은 “한국 불교조각 중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한 석굴암 본존상을 계승하여 자비로운 얼굴, 당당하고 균형 잡힌 신체, 풍부한 양감(중량감) 등에서 통일신라 전성기 양식을 엿볼 수 있어 ‘미남불’로 불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역사의 유적과 유물은 제자리에 있어야 그 값어치를 더한다. 그럼에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서울 시민에게는 이걸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왕현철 전 KBS PD가 집필한 '왕PD의 토크멘터리 조선왕조실록' 



 이처럼 청와대는 고려에서 현대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려의 남경(궁궐터) =>경복궁 후원(조선) =>조선총독부 관저(일제강점기) =>미군정장관 관저(광복 후) =>경무대(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청와대(윤보선 대통령 이후)의 변천 과정을 겪어 왔다. 우리의 장구한 역사가 굴곡지게 이어져 왔음을 청와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청와대, 지금까지는 지도자의 정치 공간이었다. 이제부터는 국민의 산책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중간 중간에 마련 된 그늘막이나 의자에 일반 시민들이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부터 이 공간을 우리 스스로가 주인공이 돼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야기가 쌓여 갈 것인가? 기대가 된다. 예약 혹은 자유 관람으로 한 번은 꼭 둘러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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