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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중궁궐을 위한 변명, 왕은 어떻게 소통했나? - 왕현철 전 KBS PD/왕PD의 토크멘터리 <조선왕조실록> 저자
  • 기사등록 2022-04-09 18:13:43
  • 기사수정 2022-04-15 1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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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궁궐을 구중궁궐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아홉 겹의 담으로 둘러싸인 깊숙한 공간을 의미한다. 

서울에는 조선시대의 궁궐 5개가 남아 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이다. 


조선 500년 동안 왕은 5개의 궁궐을 집무실이나 생활공간으로 번갈아서 이용했다. 

궁궐에서 왕을 뵙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 개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얼핏 구중궁궐에 갇힌 왕의 모습이 연상된다. 

실제로 그랬을까? 왕은 어떻게 백성과 신하들과 소통을 했을까?



경복궁 강령전. 임금의 연침으로서 내전이자 침전이다.  출처=경복궁관리소  




 “(나의)눈과 귀가 미치지 못하여 옹폐의 환에 이를까 두려워서 신문고를 설치한다.” <태종실록2년 1월 26일>


 태종이 신문고를 설치하면서 내린 교서의 일부다. 

옹폐의 환은 임금의 총명을 가리는 인의 장막을 일컫는다. ‘아부’하고 ‘충성’하는 아랫사람에게 둘러싸여서 자신의 판단이 흐려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태종은 억울함이나 원통함을 갖고 있는 백성은 궁궐로 와서 북을 치고 임금에게 직접 아뢰게 했다. 

태종은 옹폐의 환이라는 장막을 뚫고 백성의 목소리를 직접 듣겠다는 제도를 마련한 것이다. 

 

임금이 궁궐 밖으로 나가면 백성은 격쟁을 했다. 격쟁은 징이나 꽹과리를 치고 임금에게 다가가서 자신의 사정을 아뢰는 것이다. 


왕의 행차에 모든 백성들이 엎드려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특히 정조가 화성(수원)을 오갈 때 격쟁으로 길 위에서 백성의 소리, 여론을 수렴한 것은 유명하다. 


신문고와 격쟁은 임금과 백성이 직접 소통하는 길로서 조선후기까지 대체적으로 유지가 됐다.

 

아무리 좋은 제도가 있어도 임금의 의지가 없고, 또한 옹폐의 환이 있으면 무용지물이다. 왕의 자격을 잃은 연산군이나 광해군 때는 이러한 제도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반면 세종을 비롯한 대부분의 왕은 이에 더해 소통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다,


 “즉위해서 사경(새벽1시 ~3시)에 옷을 입고, 날이 밝으면 조회를 받고, 정사를 보고, 윤대를 행하고, 또 경연을 함에 있어서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세종실록32년 2월 17일>

 

 세종이 새벽 일찍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는 내용으로 조선의 왕 대부분의 하루 일정도 이와 비슷했다. 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자. 

 

 “오경(새벽3시~5시)의 북소리가 또 사람을 재촉하네.”<서거정의 사가시집>

 

 조선 전기의 문인 서거정이 조회에 나가기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나서 준비해야 하는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조회는 상참과 조참이 있다. 

 상참은 임금의 집무실에 해당하는 편전에서 임금과 당상관 이상의 신하가 매일 만나서 정사를 논의하는 것이다. 

이런 고달픔을 이해한 세종은 나이가 많은 황희나 맹사성에게는 5일에 한 번 참석하도록 했다. 


세조도 게으른 왕은 상참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불평은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세조는 상참이 끝난 후 술자리까지 이어갔다. 세조도 조선 판 낮술의 원조로서 소통을 중요시 했다.

 

조참은 근정전 등 정전에서 문무백관이 임금에게 문안을 드리면서 정사를 아뢰는 것이다. 한 달에 네 번 하도록 <경국대전>에 규정을 두었다. 상참과 조참은 모두 이른 새벽에 열린다.

 조선의 임금과 관리들은 새벽잠이 없어야 했고, 해가 뜨기 전부터 얼굴을 맞대고 정사를 논의한 것이다.


 임금은 경연도 해야 했다. 경연은 왕의 공부를 위해서 신하들과의 수업이다. 조강, 주강, 석강으로 하루에 세 번 열리고 때로는 보충수업 격인 야대까지 있었다. 

성종은 재위 25년 동안 경연을 거의 빠트리지 않았다.


 경연은 조선 초기부터 도입되었다.<태조1년 7월 28일> 

경연관은 20여명 이내로 고위직뿐만 아니라 중·하위직이지만 젊고 똘똘한 집현전이나 홍문관원도 된다. 신하들의 다양한 의견이 임금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경연에서는 신하가 임금의 공부 스승이기 때문에 왕과 신하의 위치가 뒤바뀐다.

 

특히 경연에서는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이나 역사의 좋은 사례가 나오면 바로 인용해서 현실의 정치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공부가 자연스럽게 국사를 논의하는 장소로 바뀌는 것이다. 


경연은 비공식적인 국사의 장이기 때문에 보다 편하고 진솔하게 임금에게 직언을 올릴 수 있다. 상참과 조참이 공식적인 업무라고 하면 경연은 공부를 겸한 비공식적인 업무라고 할 수 있다. 


 왕은 고위직이나 핵심부서만 만나는 것은 아니었다. 세종 때부터는 윤대를 실시했다. 윤대는 조회나 경연에 참여하지 않는 부서들 돈녕부, 봉상시, 전농시, 예빈시, 서운감, 전의감 등 24개의 부서와 해당 관리를 만나는 것이다. 

윤대는 매일 차례를 정해서 왕을 뵙고 자신들의 업무와 애로사항을 건의했다. 

 

임금에게 간언을 올리는 부서도 있다.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이다. 세 부서는 고유의 업무도 있지만 조정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을 때 스스럼없이 왕을 뵙고 직언이나 상소를 올린다. 전원이 사직서를 내걸고 왕을 압박하기도 한다. 


 특히 사간원과 사헌부는 임금의 이목(耳目)이라고 해서 임금의 귀와 눈의 역할을 한다. 두 부서 수장들의 직급은 낮지만 이들 보다 직급이 높은 영의정이나 판서들도 그들의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언로를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왕PD의 토크멘터리 <조선왕조실록>. 





 또한 사간원과 사헌부는 서경(署經) 권한도 갖고 있다. 서경은 일종의 임명동의제다. 

왕은 관원을 먼저 임명하고 이름, 이력, 문벌(친가 및 외가의 집안 내력)을 써서 대간에게 내린다. 대간은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리를 통칭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임금이 내린 내용과 평판을 종합해서 대간이 50일 안에 서명을 하지 않으면 왕은 임명을 철회해야 한다. 


현대의 인사청문회보다 더 강력한 왕의 인사권을 견제하는 장치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서경 권한을 행사한 많은 사례가 있다.


 태종 : 박자청은 공사 감독을 부지런하게 잘해서 임명하려는데, 사간원은 끝까지 서경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나?

 사간원 : 만일 공이 있다면 상이나 다른 직책을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 등은 정말 동의하고 싶지 않지만, 만일 전하께서 강요하신다면 명을 따를 수밖에 없겠지요.

 태종 : 이것이 무슨 말이냐! 내가 부탁하고 애걸복걸해서 임명에 동의했다고 생색을 내려는 것인가!  <태종실록13년 6월 16일>


 태종과 서경을 거부하려는 사간원과의 팽팽한 줄다리기로 왕조국가이지만 임금이 독단적으로 업무를 처리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뿐만이 아니다. 임금과 소통하는 또 다른 통로가 있다. 상소다. 

 상소는 부서단위나 전·현직 관리, 사림 등이 다양한 형태로 임금에게 올렸다. 상소의 대부분은 임금에게 올리는 간언이거나 현 시국을 타개하기 위한 제언 등이 담겨져 있었고 자신의 목숨과도 맞바꾸는 거침없는 내용도 쏟아냈다. 


 세종과 호흡이 잘 맞았던 집현전도 언문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조헌은 ‘지부상소’를 올렸다.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지부 즉 도끼로 자신을 죽여도 좋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영남 사림의 거두 남명 조식은 제13대 명종에게 수렴청정으로 정치에 깊숙이 간여한 문정왕후를 가리켜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치지 않는다”고 쏘아붙였다. 목숨을 내 건 상소였다. 그럼에도 왕은 상소에 대해서 비답을 내려야 했다. 


 왕이 직접 신하나 백성들에게 바른 말을 구하기도 했다. 이를 구언(求言)이라고 한다. 특히 자연재해로 농사의 어려움을 겪을 때 왕은 구언을 내렸다. 구언에는 왕이나 조정에 아무리 심한 말을 해도 벌을 주지 않는다는 단서조항을 단다. 


 구언도 상소처럼 현재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쓴소리와 함께 왕의 공구수성을 요구한다. 공구수성은 왕이 하늘을 두려워하고 수양해서 반성하는 것이다. 왕은 거처를 비좁은 곳으로 옮기거나 반찬가짓수를 줄여야 했고 근신해야 했다. 백성의 소리를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은 이처럼 상참, 조참, 경연, 윤대, 간언, 서경, 상소, 구언 등 씨줄과 날줄로 왕과 신하와 백성이 소통하는 다양한 제도가 있었고 조선왕의 대부분은 이런 제도를 지키려고 노력을 했다. 현대의 대통령 제도와 다른 다양한 소통 장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의 정치와 생활공간인 궁궐, 왕이 홀로 지내는 구중궁궐의 닫힌 공간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속에는 소통을 위한 다양한 장치가 마련되었음을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변명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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