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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51) 창덕궁 희정당 ②남이(南怡), 반역을 꾀 했는가?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wang…
  • 기사등록 2020-01-18 22:08:06
  • 기사수정 2020-01-20 17: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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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南怡)는 조선 세조, 예종 대의 무신으로 인생을 짧고 굵게 살았다. 그는 세조 대 19살에 무과에 급제해서 공조판서(건설부장관,26세) 오위도총부 도총관(27세), 병조판서(국방부장관,27세)를 거쳐서 예종 즉위년 저자 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이는 환열형을 당하고 7일 간 효수된다. 그가 28살이 되던 해로 죄목은 반역죄였다. 그는 왜 반역을 했는가? 그 실상은 무엇인가? 


 예종은 즉위년 10월에 창덕궁 숭문당으로 나간다. 숭문당은 오늘날 희정당이다. 희정당은 임금의 휴식공간이지만 실제로 정사는 여기서 더 이루어졌다. 

숭문은 유학을 존중하고 글을 닦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공부를 싫어했던 연산군이 신하들 몰래 숭문당을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편액까지 했다. 이후 숭문당/희정당으로 혼용되어 불렀으나 현재는 희정당으로 편액이 되어있다. 희정당은 왕비의 거처인 대조전과 마주보고 있다.

 

예종이 남이를 국문한 희정당 뜰. 사진=왕현철 



예종은 남이를 숭문당(희정당) 뜰로 잡아 오게 하고 반역한 이유를 묻는다. 남이는 자신은 국경을 지키고 국가를 위한 충의지사라고 하면서 처음에는 반역을 부인했다. 그러나 그는 곤장을 맞은 후 유자광이 밀고한 내용은 사실이라고 자신의 말을 번복해서 반역을 꾀했다고 했다. 

 남이가 반역을 꾀하기 위해서 군사를 동원한 사실이 없고, 그와 반역을 도모한 일당이라고 몰아붙인 사람들도 남이와 공모를 부인했다. 

남이의 반역은 그의 번복된 진술뿐이었다. 예종은 그럼에도 그를 처형하고 수십 명을 참수한다. 


 그러나 예종은 남이가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진술한 보성군 이합(李㝓)과 그의 아들 이내(李徠)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생명을 지켜준다. 이합도 남이와 공모를 부인했다. 예종은 다른 공모자들과 달리 이합의 진술만은 받아들인 것이다. 조선시대 ‘모반의 죄’를 다루면서 왕으로 추대되려는 사람의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합은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의 셋째 아들로 종친이었다. 

 

인조 대의 문신 김시양은 그의 저서 <부계기문>에서 ‘남이의 죄명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남이는 예종 대에 역모로 목숨을 거두지만 세조 대의 행적을 살펴봐야 그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남이가 무과에 급제를 하고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은 두 개의 전쟁이었다. 그 첫 번째는 <이시애의 난>이다. 이시애는 세조 13년 함길도에서 1만6천 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남이는 이시애의 반란군을 진압할 진북장군 강순의 휘하 행부호군으로 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렸다. 그는 이숙기와 더불어 선봉장이 되어서 사력을 다해서 반란군을 가장 많이 진압했고 적의 깃발도 빼앗았으며 몸에 화살을 4,5개 맞았으나 얼굴빛은 태연자약했다고 한다. 

남이는 <이시애의 난> 진압 공로로 1등 공신에 오르고 벼슬의 품계도 껑충 뛰어 올라 중추부 동지사(종2품)가 되고 행호군으로 승진도 한다. 세조는 남이에게 국가 방어 대책을 묻는 등 가까이 했다. 

 

남이에게 또 다시 기회가 온다. 이시애의 반란이 진압된 시점에 명나라는 건주위 정벌을 함께 하자고 우리에게 요청했다. 남이는 이 전쟁에서 대장이 된다. 그의 상관은 주장(主將) 강순이었다. 남이는 강순의 지휘 아래서 건주위 두목 이만주와 그의 일족을 참하는 공을 세운다. 남이의 이름이 명나라까지 떨쳐진 것이다.  

 남이의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에 첫 등장하는 것은 세조 9년이다. 그가 무과에 급제한 3년 후다. 세조는 경복궁 후원 서현정에서 군사훈련의 하나인 진법 연습과 활쏘기를 연다. 세조는 진법 훈련에서 군사들의 기강이 해이해진 것을 질타했으나 남이 등 10여 명에게는 1자급을 더 올려준다. 기록에는 없으나 활쏘기에서 능력을 발휘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남이는 어렸을 때부터 활과 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후 남이는 장교의 신분으로 북정에 참여하고 세자를 호위하며 살인을 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도적을 잡는 업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세조 13년 <이시애의 난>과 <건주위 정벌>에서 그의 능력이 탁월하게 발휘된 것이다. 

 남이는 건주위 정벌 후 공조판서에 임명된다. 남이가 무과에 급제한 7년 후, 26세에 대신이 된 것이다. 너무나 빠른 출세다. 세조의 두터운 신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남이는 임금의 두터운 신임과 자신의 빠른 출세에도 불구하고 남의 떡이 더 크게 보인 것 같다. 세조 14년 역시 경복궁 후원 서현정에서 여러 대신들과 활쏘기를 하고 술자리를 나눈다. 

남이는 술에 취해서 세조에게 “귀성군(龜城君) 이준을 지나치게 사랑하시니 신은 살짝 그르게 여깁니다”라고 취중 진담을 털어놨다. 이준은 세조 대에 또 다른 젊은 출세자다. 이준은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둘째 아들로 세조의 조카였다. 이준은 남이와 같은 나이로서 <이시애의 난>의 진압군 총 책임자였고 27세에 영의정(국무총리)에 오르는 인물이다. 

 

세조는 “귀성군은 나의 지친이고 큰 공을 세웠으니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라고 펄쩍 뛰면서 남이를 의금부에 가둔다. 세조는 그 다음날 남이를 풀어주지만 남이는 “내 말은 옳다. 이것은 죄가 아니다”라고 그를 위로하려는 사람들의 모골이 송연해지도록 했다. 남이는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세조는 남이가 건주위 정벌에서 공을 세우고 돌아온 뒤 “그대는 이미 공신에 봉해졌고, 또 큰 공을 이루었으니 다만 자랑하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고 이미 당부를 했을 정도다.

 

2개월 후 남이는 또 다시 자신을 과신하는 말을 올린다. 세조는 남이를 비롯한 여러 대신 및 종친들과 술자리를 나누면서 병서를 읽고 군사전략을 담론했다. 여기서 남이는 자신은 오로지 오랑캐를 평정하는데 뜻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에게 20만 명을 주면 천하를 평정하겠다고 했다.


 세조는 “경의 말이 너무 지나치다”라고 자제를 시켰다. 세조가 건주위 오랑캐를 평정하기 위해서 파견한 군사는 만 명이었다. 남이가 국경을 평정하기 위해서 20만 명을 요구한 것은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세조는 그를 병조판서에 임명한다.   

 

예종은 즉위년에 남이를 다시 병조판서로 삼았으나 바로 취소한다. 중추부 지사 한계희가 “남이의 사람됨이 병사를 맡기기에는 마땅치 못하다”라고 임금에게 건의를 했기 때문이다. 

세조의 승하 후 남이 견제 세력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병조참지 유자광이 승정원을 통해서 남이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밀고를 한다.


 유자광도 <이시애의 난>으로 출세를 하기 시작한다. 유자광은 남원의 갑사였으나 장문의 상소문을 올려서 이시애를 진압할 방략을 제시한다. 그가 제시한 책략은 유용했다. 세조는 그 공을 인정해서 서자 출신 유자광을 겸사복으로 임명하고 벼슬길을 열어 준다. 

 

유자광은 남이가 자신의 집에 와서 “햇살이 흰 혜성이 나타나서 병란의 조짐이 보이고 자신이 거사하고자 한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자광이 밝힌 남이의 역모 내용이다. 남이가 반역을 꾀한 행동이나 조직은 없었다. 

 남이는 자신을 밀고한 사람이 유자광임을 알고서 “유자광은 본래 신에게 불평을 가졌기 때문에 무고한 것입니다”라고 자신의 충절을 강조했다. 

그랬던 남이는 곤장을 맞은 후 자포자기했던 것인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태도로 확 바꾸어서 자신이 역모를 꾀했다고 진술한다. 그 과정에서 남이와 최근 행적을 같이 한 사람들의 이름도 드러난다. 


남이와 공모한 사람들의 진술을 보면

첫째, 남이가 사이가 좋지 않은 유자광에게 역모를 털어놨다는 것이 현실성이 떨어지고,

둘째, 남이는 과거 자신의 상사 강순과 공모했다고 밝혔다. 강순은 함길도 절제사를 거쳐서 <이시애의 난>과 <건주위 정벌>의 1등 공신이다. 당시 79세였다. 강순은 자신은 국가의 은혜를 입고 있는데 남이와 공모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부인했다. 강순은 “남이는 젊어서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고 한갓 큰소리만 쳐서 사람을 능멸한다”라고 세조 앞에서 남이를 무안 준 적이 있었다. 이것이 남이가 강순을 끌어들인 배경일까?

셋째, 남이와 공모한 사람들은 남이가 쓰려고 한 상소문 초안을 고쳐 주고, 남이와 함께 바둑을 두거나 활쏘기를 하고, 남이의 병을 치료해 준 자들이었다. 그리고 평소 가깝게 지낸 자들도 있었다. 반역으로 추정되는 진술이나 행동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남이와 그 공모자들의 진술에서 반역으로 보기에는 의문점 투성이었으나 예종은 바로 환열형에 처하고 공모를 부인했음에도 수십 명을 참수한다. 

 


남이섬(강원도 춘천시) 남이섬 설립자 민병도는 남이장군의 넋을 위로하고 장군의 기상을 기리기 위해 돌무더기 주위에 봉문을 쌓고 추모비를 세웠다. 남이 묘는 경기도 화성에 있다. 사진=네이버이미지.

 


조선시대 반역죄는 삼복(삼심제도)을 행하지 않았고 왕에게 모든 형벌권이 집중돼 있었다. 그 폐해가 자긍심 혹은 자만심 가득한 조선의 젊은이를 쓰러지게 한 것이다.  


남이와 강순은 사후 349년이 지난 순조 18년(1818년) 신원이 복원된다. 


남이가 남긴 시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서 다 없애고 / 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서 없어졌네 / 豆滿江波飮馬無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 평정 못 한다면 / 男兒二十未平國

뒷세상에 그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오 / 後世誰稱大丈夫


허리에 큰 칼을 차고 백두산과 두만강을 바라보면서 천하를 호령하겠다는 남이의 기상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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