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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50) 창덕궁 희정당 ①효종, 송시열을 독대(獨對)하다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wang…
  • 기사등록 2020-01-11 21:37:43
  • 기사수정 2020-01-12 17:5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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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들은 신하들과 단독으로 거의 만나지 않았다. 임금이 대신들과 만나서 국가적 중대사나 실무적 업무를 처리할 때도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과 왕의 비서 승지들이 같이 들어갔다. 임금과 신하의 독대로 인해서 임금의 귀에 참소하는 말이나 당파적 이익의 말이 들어갈 수 있음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효종은 재위 10년 3월 11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일반적인 업무를 끝내고 이조판서 송시열만 남게 한다. 효종은 정사를 논의하던 신하들과 승지와 사관 및 내시조차 모두 물러가게 한다. 그 대신 문은 활짝 열어 놓지만 둘 만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효종과 송시열이 독대한 창덕궁 희정당.



효종은 송시열에게 왜 어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임금과 신하, 둘 만이 남아서 은밀히 나눈 이야기는 더욱더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역사에 묻힐 뻔 했던 효종과 송시열의 독대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는 것은 사관의 노력 덕택이다. 당시 사관은 이광직이었다. 

이광직은 송시열에게 편지를 보내서 임금과 독대한 내용의 기록유무를 묻고 역사에 남기고 싶다고 했다. 

송시열은 처음에는 결정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송시열은 “임금과 독대한 내용이 이루어졌다면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없지만, 임금이 이루고자 한 뜻을 후세에 전해야 한다”라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송시열은 임금과의 대화 내용을 봉함해서 사람을 시켜서 사관에게 보내고자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송시열이 기록을 넘기고자 한 그 날 사관 이광직의 부음을 듣는다. 

 

그 뒤 사관은 이세장과 이선이었다. 이 둘 사관도 이광직처럼 송시열에게 편지를 보내서 독대 내용을 역사에 남기고 싶다는 청을 했고 송시열은 그 청을 따랐다. 이렇게 해서 이선이 현종 대에 기록을 추가했으나 <현종실록>편찬에서 삭제해 버렸다. 


현종 대는 또 다른 하나 <현종개수실록>이 있다. 효종과 송시열의 독대는 <현종개수실록>에 실려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대화 내용은 사관이 직접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송시열의 기록을 사관이 옮겨 적은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의 사후에 편찬하고 <부록>에는 보통 편수관 명단이 있다. 세종실록의 <부록>에는 하동부원군 정인지를 책임자로 해서 58명의 명단이 기록돼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편찬자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종실록>과<현종개수실록>의 <부록>에는 편수관 명단이 없다. 효종과 송시열의 독대를 <현종실록>에서 누가 뺐고 <현종개수실록>에서 누가 추가했는지 알 수는 없다. 



 효종이 송시열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효종은 “오늘 기분이 상쾌하니 속마음을 다 털어 놓겠다”라고 하면서 재위 10년 동안 가슴 깊숙이 쌓아온 심경을 차분히 풀어낸다. 송시열에게 털어놓는 그 이유도 밝힌다. 

 

효종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잊을 수 없었다. 효종은 그 치욕을 앙갚음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청나라를 치는 것이다. 이것을 역사에서 효종의 북벌이라고 한다. 효종은 그동안 청나라를 칠 자신의 속내를 신하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슬쩍 열어 보였으나 이런 뜻을 뒷받침해 줄 신하들은 별로 없었다. 신하들 대부분은 현재의 부귀에 안주하고 있었고 청나라를 치는 것은 국가와 집안이 모두 망하는 것이라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효종은 신하들 생각을 개탄스럽게 생각했지만 자신의 뜻을 함께 실천할 인물을 찾고 있었고 그 인물이 송시열이었다. 효종이 송시열의 마음을 떠 보았을 때 송시열은 임금의 마음을 따를 결심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제갈공명도 전쟁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했다면서 만일 실패해서 나라가 망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효종의 결심의 깊이를 찔렀다. 


효종은 “경은 나의 뜻을 시험하는 것이다”라고 웃으면서 자신의 장점과 청의 정세를 분석했다.

 효종은 첫째, 나는 전쟁(병자호란)을 경험해서 활 쏘기, 말 타기, 진법을 익혔고 둘째, 청나라의 인질로 들어가서 그 곳의 산천이나 형세, 거리를 자세히 알고 있으며 셋째, 그 곳에 오랫동안 머물러서 (적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며 넷째, 병자호란 때 인질로 청에 잡혀간 우리 백성 수만 명도 내응을 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 


 그리고 “(청나라는)차츰 훌륭한 인재들이 줄어들고 있고, 중원을 차지한 이후로 무에서 문으로 방향을 틀고 있으며, 칸이 비록 영웅이기는 하지만 주색에 빠져서 그 형세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청의 약점을 설명했다. 

 

효종은 인선왕후 장씨와 1남 6녀를 두었다. 후일 효종 다음의 왕 현종이 되는 외아들은 어릴 때부터 질병이 잦았다. 효종은 세자가 궁중에서 자라서 문으로 국가를 다스릴 수 있으나 병법(兵法)은 모르기 때문에 청을 치는 것은 자신이 하지 못하면 세자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 당시 효종은 41세였다. 효종은 자신도 50세가 넘으면 뜻과 기운이 쇠약해져서 전쟁을 하기 어렵다는 초조감을 갖고 있었다. 효종은 자신의 심기를 맑고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주색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효종은 후궁을 한 명만 두었고 옹주 1명을 낳았다.

 



효종은 그동안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군사를 기르고 있었다. 또한 앞으로 10년 동안 10만 명의 병사를 양성해서 자식처럼 돌보아서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군사로 키운다는 계획과 함께 그 목표가 이루어질 때까지 송시열에게 자신의 곁에 있어달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송시열은 당파적 세력이 없기 때문에 동조할 세력을 은밀히 논의하라고 당부를 하면서 앞으로 해야 할 급선무를 묻는다. 

 

송시열은 전하의 큰 뜻(북벌)을 세우고 저를 사용하고자 하니 목숨을 걸겠다고 약속을 하면서 주자학의 학자다운 답을 내 놓는다. 송시열은 사람들이 진부하고 세상 물정과 동떨어진다고 여기는 격물, 치지, 성의, 정심을 설명한다. 

제왕은 우선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린 연후에 기강을 세워서 마음을 다하면 신하들이 자신을 잊고 국가를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한다는 논리였다.

 

효종은 송시열의 논리에 맞장구를 치지만 머릿속은 온통 군사를 양성하는 방법에 골몰하고 있었다. 효종은 송시열이 이전에 ‘군사 양성과 백성을 기르는 것은 서로 어긋난다’고 제안했던 것으로 화제를 돌려서 상치되지 않는 방법을 묻는다. 

 송시열은 보오(保伍)의 법을 제시한다. 보오의 법은 <주례(周禮)>에서 제시한 것으로서 다섯 집을 하나로 묶어서 그 중에서 전문적인 병사 1명을 기르는 방법이다. 송시열은 이 또한 기강을 먼저 세워서 전하의 사심이 없어야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효종과 송시열의 독대는 끝났다. 효종은 청나라를 치겠다는 국가의 기밀을 송시열에게 털어놓고 그 계획을 함께 세우고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한 번의 만남으로 모든 해결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효종은 앞으로 모든 일을 경과 은밀히 논의하겠다고 하면서 그 방법은 글로서 하고자 했다. 


 송시열은 사실 효종과의 독대 이전에도 밀서를 받았다. 그리고 독대 이후에도 몇 차례 더 밀서를 받는다. 그러나 이 밀서들은 남아있지 않다. 그 밀서들은 불태우라는 어명에 따라서 송시열은 불태웠기 때문이다.  

 

효종이 돌아가시기 전 세자를 통해서 전달된 한 통의 밀서와 또 다른 효종의 어찰 3통은 남아 있다. 그 밀서에는 불태우라는 어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성을 축조하고 말을 기르며 군사를 뽑고 훈련하는 구체적인 방안이 담겨져 있다. 

독대와 밀서에서 제시한 대로 10년 동안 10만 명을 양성하고 힘을 합쳐서 차분하게 준비해 갔다면 효종의 북벌도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효종의 원대한 꿈은 무너졌다. 효종은 송시열과 독대한 2개월 후 얼굴에 종기가 생겼고 그 종기의 독이 얼굴에 흘러내려서 침을 놓았으나 결국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한다. 효종의 승하와 함께 북벌도 힘을 잃었다. 

 

효종은 송시열과의 독대에서 “오늘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걱정이지 성공의 어려움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라고 북벌에 대한 준비와 강한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오늘 날 의학으로 보면 죽음에 이를 정도는 아니라고 여길 수 있는 얼굴의 종기에 무너진 것이다. 너무나 아쉽다. 조선의 운명이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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