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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49) 최부의 <표해록>, 충과 효의 갈림길에 서다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 기사등록 2020-01-04 20:32:06
  • 기사수정 2020-01-08 16: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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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 충과 효는 실천하고 지켜야 할 삶의 중요한 가치였다. 그 논쟁도 치열했다. 2020년 새해가 밝았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정신, 대의(大義)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의 대의(大義)는 무엇인가? 스스로 자문해 본다”

           


 최부(崔溥)는 조선 성종, 연산군 대의 문신이다. 그는 과거에 세 번이나 급제한 수재로서 교서관 저작랑,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서 33세에 제주3읍 추쇄경차관으로 임명되어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간다. 이 뱃길이 그의 운명을 뒤바꾼다.  

 제주는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세 고을로 나누어 있어서 제주 3읍이라고 했다. 추쇄는 원적에서 도망한 자를 찾아내는 것이고 경차관은 지방 시찰을 위해서 서울에서 파견하는 임시 관리다. 


표해록(최부 저 금남은 최부의 호).사진=네이버이미지

 

그는 제주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의 집안의 종 막금이 제주까지 와서 부음을 전했고 상복도 준비를 해 왔다. 그는 고향 나주로 돌아가야 했다. 당시에 제주를 오가기 위해서는 순풍을 기다려서 뱃길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순풍을 만나기 위해서는 몇 개월씩 기다리기도 했다. 당시의 날씨가 고르지 못해서 그의 뱃길을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으나 일부 찬성하는 의견도 있어서 최부는 바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최부는 천붕을 당했으니 마음이 급한 것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제주 목사가 그의 귀향을 돕는다. 제주 목사는 배는 국가의 배보다도 더 튼튼하고 빠른 수정사(水精寺) 스님의 배를 이용하도록 하고 수로를 잘 아는 자, 해적으로부터 보호 할 군인들을 붙여 준다. 그의 일행은 43명이 되었다.  

 날씨 정보가 충분하지 못한 바다에는 운명에 맡겨야 했다. 그와 일행은 불운과 맞닥뜨렸다. 그는 제주에서 표류해서 중국 절강성, 베트남, 하북성 등을 거쳐서 결국에는 중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서 표류한 후 약 6개월 만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숱한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생명은 끈질겼다. 43명 모두의 무사귀환이었다. 최부 일행의 전원 귀환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최부의 현명한 지도력도 큰 역할을 했다.

 최부는 성종 18년 9월 17일 제주3읍 추쇄경차관으로 임명되어서 대궐을 하직했으나 다음해 6월 14일 서울로 돌아온 것이다. 

 

성종은 최부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부친상을 마치면 다시 관리로 임명하겠다고 하면서 우선 그가 겪을 것을 기록하게 한다. 최부는 서울 청파역에 8일 동안 머물면서 자신이 겪은 일을 일기 형식으로 썼다. 이것이 3권으로 남겨진 <표해록(漂海錄)>이다. <표해록>은 후일 최부의 관리 진출의 걸림돌이 된다. 

 

그는 <표해록>을 임금에게 바치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부친의 3년 상을 마쳤다. 성종은 3년 상을 마친 최부를 사헌부 지평으로 임명한다. 

사헌부는 관리를 규찰하고 공과 죄를 논해서 탄핵을 하며 풍속을 바로잡는 조직이다. 사헌부는 조선시대 언론의 역할을 하는 사간원,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홍문관과 더불어 청요직(淸要職)이라고 한다.


 청요직은 매우 중요한 자리로서 출세 길에 들어섰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청요직은 조선시대 관리의 선망의 대상이다.  


 그런데 성종이 예상치 못한 문제가 불거졌다. 사헌부 지평으로 임명한 최부를 사간원에서 서경(署經)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서경은 임금이 관원을 임명한 뒤에 그의 이름, 문벌, 이력 등을 써서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에게 임명 가부를 묻는 것이다. 서경은 임금의 인사권을 견제하는 것으로서 현재의 인사청문회보다 더 강력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관리를 임명한 후 50일 내에 서경을 하지 않으면 임금은 그 임명을 철회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부는 사간원에서 서경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임금에게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청했다. 성종은 사간원을 불러서 최부를 서경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사간원은 “최부가 표류한 후 본국에 귀환해서 부친상을 당한 슬픈 감정을 말씀드리고 빨리 빈소로 돌아가야 했는데, 서울에서 8일 동안 머물면서 일기를 썼으니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라고 서경하지 않는 이유를 밝혔다. 

 

최부는 임금의 명으로 자신의 표류 행적을 일기 형식으로 남겼다. 조선시대 임금의 명을 어기는 것은 불경죄로 사형까지 가능했다. 임금의 명에 따라서 쓴 기록이 돌아가신 어버이를 섬겨야 하는 효(孝)와 충돌한 것이다. 


성종은 사간원의 서경 권한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성종은 최부의 임명을 철회한다. 대신 성종은 최부를 만나서 그가 겪은 인고의 세월을 듣고 옷과 가죽신을 하사한다. 성종은 “최부가 사지(死地)를 헤쳐 나오면서도 능히 나라를 빛냈기 때문이다”라고 하사품을 내린 이유를 밝혔다.

 

해가 바뀌었다. 최부가 부친상을 당한 5년 후, 성종은 그를 다시 홍문관 교리로 임명한다. 이번에는 사헌부에서 서경을 하지 않았다. 성종은 “최부가 슬픈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임금의 명으로 일기를 썼다”라고 강조하면서 임명 강행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사헌부는 “최부가 아무리 임금의 명령을 받았더라도 대의(大義)를 훼손했기 때문에 정상 참작을 할 수 없다”라고 물러서지 않았다.  


성종은 문관과 무관의 인사를 추천하는 이조와 병조판서를 불려서 의견을 구했다. 두 판서 모두가 최부는 임금의 명으로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서울에 머문 정상을 참작해서 임명에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냈다. 최부가 임명 된 홍문관도 “최부가 자신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해서 8일 동안 머문 것은 슬픔을 잊은 것이 아니고 임금의 명령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라고 임명을 찬성했다.


 그러나 사헌부는 “충신은 효자 가문에서 나온다고 했으니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한 최부가 어떻게 임금에게 충성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원래의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성종은 “나는 중원을 알고 싶었다. (사람은)듣고 본 것은 세월이 지나면 점점 잊어버린다”라고 최부가 돌아온 후 바로 기록을 남기게 한 이유를 다시 강조하면서 조정의 대신에게 까지 논의를 확대시켰다.


대신들은 “임금의 명령을 중히 여겼다”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한 효자다”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좋다”라고 최부를 변호하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사헌부는 “조정의 기풍과 정의가 한 번 무너지면 뒷날의 폐단을 막기 어렵다”라고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성종은 결국 최부의 홍문관 교리 임명을 철회한다. 성종은 서경권한이 있고 원칙을 강조하는 사헌부의 의견을 존중한 것이다. 최부는 임금의 명으로 쓴 <표해록>으로 두 번이나 관리 진출의 발목이 잡힌 것이다. 

 

사실 최부는 아버지의 부음을 들은 후부터 관복을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최부는 중국 황제를 뵈올 때 중국 예부의 강권으로 어쩔 수 없이 문 앞에서 딱 한 번 상복을 길복으로 갈아입었다.

 최부는 심지어 도적 떼를 만나서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도 그 일행이 조선 관리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 관대를 갖추도록 해야 한다는 권유에도 “차라리 죽을 지라도 효도와 신의가 아닌 일을 차마 할 수 없다”라고 상복 차림을 유지했다. 

최부의 효심은 지극했으나 사간원과 사헌부의 눈높이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최부가 제주 앞 바다에서 표류한 뒤 중국 각지를 거쳐 압록강을 넘어 조선에 들어오기까지 여정을 보여주는 지도. 사진=네이버 이미지


성종의 명으로 기록한 <표해록>, 최부의 임명과 서경 거부,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충과 효는 우리에게 동떨어진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특히 효를 실천하는 것 중에 하나인 3년의 여묘살이는 오늘날 실천하기 어려운 제도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에게 충과 효는 실천하고 지켜야 할 삶의 중요한 가치였다. 그 논쟁도 치열했다. 


 2020년 새해가 밝았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정신, 대의(大義)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의 대의(大義)는 무엇인가? 스스로 자문해 본다. 새해에도 독자 여러분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합니다.   

 

 <표해록>은 번역돼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제공하는 <한국고전종합DB> 사이트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이 사이트는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일성록> 등 국가의 저작물뿐만 아니라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 개인 저작물도 1,000종류 이상 번역돼 있다. 필자가 조선시대의 자료를 수집하고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한국고전종합DB>의 덕택이다. 이번 기회에 한국고전번역원에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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