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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41) 창덕궁, 반정(反正)의 무대가 되다 ②인조반정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 기사등록 2019-10-12 22:16:05
  • 기사수정 2019-10-13 06:4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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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은 중종반정처럼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성공했다. 둘 다 창덕궁이 무대였다"

      

 

조선왕조 인조실록의 첫 문장은 “인조가 의병을 일으켜서 왕대비(인목대비)를 복위시키고 왕대비의 명으로 경운궁(오늘날 덕수궁)에서 즉위하였다”라고 시작한다. 

인조가 의병 즉 반정을 통해서 왕위에 올랐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인조가 광해군을 무력으로 권좌에서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인조반정이라고 한다. 인조반정은 인조 자신이 기획자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는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조(당시 능양군)는 무인 이서와 또 다른 무인으로 자신의 친척 신경진, 구굉, 구인후 등과 처음으로 반정을 은밀히 모의했다. 

인조는 “윤리와 기강이 무너져 종묘·사직이 망해간다”라고 대의를 내세웠다. 인조가 처음으로 모의를 한 인물은 모두 무인들이었다. 인조는 자신이 내세운 대의명분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인뿐만 아니라 인망이 두터운 문신도 필요했다. 인조가 문신을 첫 접촉한 사람은 홍문관 부교리와 동지사를 지낸 김류였다. 


 김류는 선조 대에 정시(庭試)의 과거에 합격해서 등용이 된다. 정시는 나라의 경사 등이 있을 때 임금이 생진과(生進科)의 급제자들을 대상으로 친히 시험을 쳐서 뽑는 제도로서 유생들의 학업을 권장할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김류는 재주와 명망이 뛰어나서 선조에 이어서 광해군 대에는 세자의 스승(시강원 사서), 이항복의 종사관, 홍문관 부교리, 임금의 스승(시독관), 동지사 등의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김류는 선조의 두 번째 왕비이자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의 폐모론(廢母論)에 동의하지 않아서 정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정사에 참여하지 않은 김류 등의 죄를 청했으나 광해군은 자신의 병으로 인해서 몸을 조섭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면서 결정을 미룬다.

 김류는 이 사건 이후로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인조가 김류를 접촉할 때 前동지사로 명기되어 있다.


 인조가 김류를 찾아가서 자신의 뜻을 설명하자 김류는 바로 동의했고 의기투합이 되었다. 인조가 반정을 일으키는 3년 전이었다.  


 평산부사 이귀는 국가의 변란에 대비해서 독자적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적을 방어하는 훈련을 표면적으로 내세우고 자신의 군사를 조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평산에 순찰을 온 감사 이명에게 이러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었다. 

감사 이명은 이귀의 속내를 그의 친척에게 일러바쳤고 사헌부까지 알려지게 된다. 사헌부의 상소로 이귀는 평산부사에서 파직당한다. 


 인조와 반정을 처음으로 모의한 신경진은 바로 파직당한 이귀를 찾아가서 인조의 뜻을 전달한다. 이귀는 자신이 원래부터 국가의 위기에 대처하겠다는 뜻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쾌히 반정에 합류하고 그의 두 아들 이시백, 이시방도 참여시켰다. 


 이에 더해서 병자호란 때에 주화론으로 잘 알려진 최명길 등 여러 문신들도 합류한다. 인조를 중심으로 해서 반정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기본 골격이 갖추어진 것이다. 이후에도 반정모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때마침 군사훈련의 기회가 왔다. 인조와 반정을 첫 모의한 무인 이서가 장단부사가 되었다. 장단은 현재 임진강, 파주 지역이다. 그는 자신의 관할 지역 덕진(德津)에 산성 쌓기를 청하고 이것을 명분으로 해서 군사들을 모아서 훈련을 시킨다. 


 또한 반정의 편으로 반드시 끌어들여할 인물이 있었다. 훈련대장 이흥립이었다. 그는 도감군(都監軍)을 이끌고 있었다. 도감군은 훈련도감의 군사로서 선조 27년 임진왜란 발발 2년 후 유성룡을 책임자로 삼아서 설치했다. 도감군은 왕을 밤낮으로 호위하는 군사로서 나라의 큰 힘이 되었던 군대였다. 인조의 반정군도 이흥립의 도감군은 무서운 존재로 여겼다. 


 이흥립은 영의정 박승종과 사돈 간으로서 박승종의 추천으로 벼슬을 하고 있었다. 박승종은 광해군 대에 높은 벼슬을 하고 세도를 부리던 이이첨, 유희분과 함께 삼창(三昌)이다. 박승종은 밀창부원군 이이첨은 광창부원군 유희분은 문창부원군이었기 때문에 3창으로 불렀다. 이들은 반정 후 모두 처형된다. 

 영의정 박승종의 추천으로 훈련대장을 맡고 있는 이흥립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역할을 한 사람은 이흥립의 사위 장신의 형 장유였다. 장유는 대의를 내 세워서 이흥립을 설득했고 이흥립은 안에서 내응하기로 약속했다. 이로서 반정의 모든 준비가 안팎으로 갖추어진 것이다.


 인조는 반정을 길게는 5년 짧게는 3년을 준비했다. 행동 개시의 날이 다가왔다. 광해군 15년 3월 12일이었다. 장단부사 이서가 군사를 일으켰고 이천부사(伊川府使) 이중로도 부장들을 거느리고 와서 파주에 합류해서 서울로 향했다. 집결지는 밤 2경(밤 9시-11시) 서울의 홍제원이었다. 홍제원은 서대문구 홍제동에 있었고 중국 사신이 오면 옷을 갈아입는 곳이다.


 이 날 반정군의 움직임은 광해군의 귀에 들어갔다. 이이반이 반정 소식을 듣고서 상소를 한 것이다. 이이반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어서 그가 어떤 인물인가를 알 수 없다. 


 광해군은 이날 창덕궁 후원에서 후궁들과 곡연을 벌이고 있었다. 곡연은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낭송하면서 즐기는 연회다. 광해군은 술과 후궁에 빠져서 반정의 보고도 늦게 받았고 그 움직임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영의정 박승종은 다시 광해군에게 두세 번 비밀리에 아뢰서 금부당상, 포도대장, 도승지, 병조판서 등을 궁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박승종은 추국청을 설치하고 반정군에 가담한 사람을 체포하려 했으나 광해군은 허락하지 않았다. 

 박승종은 이흥립을 불러서 “그대가 김류, 이귀와 함께 모반하였는가?”라고 추궁하는 데 그쳤다. 이이반이 올린 상소의 내용은 상당히 정확했던 것이다. 이흥립은 “제가 어찌 공을 배반하겠습니까?”라는 대답에 박승종은 이흥립을 풀어주고 궁궐의 호위를 맡긴다. 박승종은 이흥립이 반정군과 내응하고 있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반면 홍제원에 모인 반정군은 자신들의 반정에 대한 고변서가 벌써 궁중에 들어갔고 처음에 모인 숫자도 수백 명에 불과해서 분위기가 흉흉했다. 그러나 반정군 대장 김류의 군사가 홍제원으로 오고 인조가 친병을 거느리고 장단부사 이서를 맞이하고 이괄을 새로운 대장으로 추대해서 군대를 편성한 이후 군중의 분위기가 안정되었다. 반정군은 1,400여 명이었다. 이괄은 약 3개월 전에 국경수비의 책임을 지는 북병사로 제수되었으나 임지로 떠나지 않고 반정군의 대장이 되었다. 


 이괄은 이로부터 약 10개월 후 자신은 비기(祕記)도 얻고 정사훈 1등이 아닌 2등으로 녹훈된 것에 불만이 있고 자신이 반역을 꾀한다고 몰리게 되자 진짜 반역을 일으킨다. 

이괄의 초기 기세는 대단해서 한양까지 입성하고(인조는 공주산성으로 피신) 선조의 후궁 온빈 한 씨의 첫째 흥안군 이제(李瑅)를 왕으로까지 추대했으나 결국 정부군에게 죽임을 당한다. 


창의문 (서울 종로구, 네이버 이미지) ▲인조는 홍제원에서 창의문을 거쳐서 창덕궁으로 쳐들어간다

 

인조의 반정군은 밤 3경(밤 11시~새벽1시)에 창의문의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서 성문을 감시하는 자들은 참수하고 북을 울리면서 바로 창덕궁에 이르렀다. 반정군과 내응을 하기로 한 이흥립은 약속을 지켰다. 이흥립은 창덕궁 정문 돈화문 입구에 포진해서 군사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인조의 반정군은 돈화문을 열고 궁궐내로 쳐들어가자 호위군은 모두 흩어졌다. 무혈입성이었다. 


 광해군은 창덕궁 후원 소나무 숲속에 놓여있는 사다리를 타고 담을 넘어서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는다. 광해군은 자신에게 아첨해서 권력을 농단한 이이첨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정세에 어두웠다. 


 안국신은 광해군이 자신의 집에 숨어있는 것을 알렸고 인조는 이천부사 이중로를 보냈다. 안국신은 상(喪)중이었다. 광해군은 안국신이 사용하는 흰 의관 차림이었다. 광해군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상복차림을 한 것이다. 이중로는 광해군을 말에 태워서 돌아오게 했다. 세자는 왕을 뒤쫓다가 놓쳐서 민가에 숨었다가 군사들에게 잡혔다. 어보는 창덕궁 후원에 버려져 있던 것을 군사들이 새벽녘에 주워왔다. 

 

인조는 광해군을 도총부 직방에 머물게 한다. 광해군은 “혼미한 임금을 폐하고 현명한 사람을 세우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어찌해서 궁녀, 내시, 급사 등 돌보는 사람들을 없이하여 나를 박하게 대우하는가”라고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혼미한 임금임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인조는 궁녀 한 명과 소용 임씨를 광해군에게 붙여주어서 모시게 한다. 


 인조반정은 중종반정처럼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성공했다. 둘 다 창덕궁이 무대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은 오점을 남겼다. 이날 군사들은 광해군을 찾기 위해서 횃불을 들고 수색하다가 그 횃불이 발(簾)에 옮겨 붙어서 창덕궁의 인정전을 제외한 모든 전각을 불태웠던 것이다. 

성공한 반정에서 남은 절차는 인조의 즉위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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