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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40) 창덕궁, 반정(反正)의 무대가 되다 ① 중종반정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10-05 22:11:31
  • 기사수정 2019-10-06 21: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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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조선 27명의 왕 중 두 명은 반정으로 왕이 된다. 중종과 인조다. 각각 연산군과 광해군을 권좌에서 쫒아낸다. 반정(反正)은 잘못된 것을 올바른 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두 반정 모두 창덕궁이 주요한 무대였고 성공했다. 

그 성격은 조금 다르다. 중종반정은 신하들이 주도했다. 그 결과 중종은 자고나니 얼떨결에 왕이 되었다. 인조반정은 인조 자신이 주도를 해서 왕위에 오른다.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해서 반정이 일어난 현장으로 가 보자. <음애일기> <동각잡기>도 참고했다.

 

중종반정의 핵심은 박원종, 성희안이다. 둘 다 성종 대에 박원종은 무인으로 성희안은 문인으로 등용되어서 성종에 이어서 연산군 대에도 중요한 직책을 맡는다. 


 박원종은 연산군 대에 승지, 평안 절도사, 지중추부사, 강원도 관찰사, 경기 관찰사 등 승승장구했다. 박원종은 그의 직책에 비해서 사간원이나 사헌부의 평가는 좋지 않았다. 

박원종이 고위직에 제수될 때 대간은 그의 능력이 직에 미치지 못한다고 간언을 했고 사간원이나 사헌부에서도 그가 지방의 책임자로서 창녀와의 추문 등 풍속을 어지럽히고 방자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벌을 주라고 요구했다. 


연산군의 평소 광기어린 처벌형태로 봐서는 사형까지 갈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박원종을 처벌하지 않았다. 박원종에게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원종은 누이 박 씨가 있었다. 박 씨는 성종의 형 월산대군 이정의 부인이 된다. 월산대군은 34살에 죽는다. 박 씨는 미인이었다고 한다. 박원종도 “풍채가 아름답다”라고 기록돼 있다. 박 씨는 연산군에게 큰 어머니다. 연산군은 과부가 된 박 씨를 궁중으로 자주 불러들인다. 세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이었다. 세자가 원자시절 박 씨의 집에서 임시로 있었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왕으로서 자격 미달이지만 인간으로서도 인륜의 도리를 지키지 아니한 인간말종이었다. 연산군은 박 씨를 궁중에 며칠 씩 머무르게 하고 간통을 한다. 그리고 쌀, 면포, 정포, 후추 등을 후하게 내린다. 

한 번에 쌀 1백석, 정포 150필, 노비 50구(口)를 내리기도 했다. 국가의 재산이 아무런 직책이나 공이 없는 여인에게로 가는 것이다. 국가의 재산을 개인의 집으로 운반해야 하는 관리는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궁궐에는 왕의 행동거지를 하나하나 돌봐주고 지켜보는 내시 궁녀들도 있다. 아무리 구중궁궐이라도 비밀은 없는 것이다. 결국 이 간통은 조정에 소리 소문 없이 퍼지고 박원종도 알게 된다. 박원종은 누이에게 “왜 참고 사는가? 약을 마시고 죽으라”라고 하면서 분하게 여겼다. 박 씨는 아이를 배자 결국 약을 먹고 자결을 했다고 한다. 

 박원종은 연산군 아래서 승승장구했지만 이러한 개인적인 원한뿐만 아니라 업무적으로도 차츰 미움을 받게 된다. 연산군은 궁궐 주변 등에 금표를 설치해서 민가를 철거하고 사냥터로 만든다. 

연산군은 세조의 능 광릉이 있는 양주 주엽산에 사냥을 갔다. 박원종은 사냥의 책임자였다. 사냥감 몰이를 할 군사들이 강을 건너지 못해 박원종은 연산군에게 사냥을 하루 이틀 늦추어 달라고 건의를 한다. 연산군은 왕의 행동을 신하가 마음대로 결정한다고 하면서 박원종을 국문하게 한다. 


 박원종이 경기관찰사로 있을 때 연산군은 김포· 통진현(강화,개성포함)· 백운산에 금표를 설치해 백성들을 쫒아내게 한다. 김포와 통진현의 백성들은 배로 물건을 운반할 때 물길을 잘 안다. 이 백성들이 없으면 국가의 세곡 등을 수로로 배를 인도할 사람이 없다. 백운산은 함경도로 가는 길목으로 막아서는 안 되는 교통의 요충지다. 


연산군은 이 외에도 가평, 과천 등 전 방위적으로 금표를 설치하게 한다. 왕의 개인적 사냥을 위해서 백성들을 쫒아내고 국가 운영에 필요한 땅과 길을 막고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박원종은 연산군의 조치에 대해서 금표를 설치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설명했다. 

박원종의 건의가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무시되기도 했다. 또한 박원종은 중국 사신이 올 때 사냥을 중지하라고 건의했다. 국가의 외교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박원종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매우 옳지 못하다”라고 승정원을 통해서 간접 경고를 한다. 연산군 재위 11,12년째다. 연산군의 광기가 막바지에 이른 때이다. 

박원종은 백성들을 다스릴 능력은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백성들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는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성희안은 박원종보다 6살 위로 한 마을에 살았다. 사관은 성희안에 대해서 극과 극으로 평가를 했다. 그는“ 젊었을 때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했으며 벼슬에서 올곧았고 천성적으로 어진 이를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겨하였으며 시국에 대해서도 비분강개하였다”라고 호평을 했다. 


그가 반정을 주도할 때 그에 대한 기대는 컸다. 그러나 성희안은 반정한 이후의 평가는 사뭇 다르다. 그는 “과거의 인연에 구애되어 유자광이나 능력 없는 친인척을 등용하고 개인적으로 사치했으며 시중드는 첩에 빠져서 생명을 잃었다”라고 악평을 한 것이다. 

 

성희안은 성종 대에 문과에 급제해서 연산군의 공부 스승이 되고 지중추부사, 형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으나 연산군 10년 무렵 연산군과 틈이 생긴다. 

연산군은 서쪽 들판에 백성들의 농사를 관람하고 망원정에 들러서 신하들에게 술을 내리고 ‘화선은 벌써 가고 어주만 남아 있네(畫船旣去有漁舟)’라는 제목으로 신하들에게 시를 지어 올리도록 했다. 

화선((畫船)은 궁중의 연회용으로 사용하는 화려한 배이고 어주(漁舟)는 고기잡이 배이지만 임금이 내리는 술(御酒)과 발음이 같다. 임금이 내리는 술로 즐기자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성희안은 ‘임금은 본래 청류(淸流)를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시를 지었다. ‘청류’는 명분과 절의를 지키는 맑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성희안은 시를 통해서 연산군을 은근히 비꼰 것이다. 성희안의 올곧은 면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연산군은 성희안의 시는 제목에 합당하지 않는다고 해서 궁궐에 들어가서 다시 지으라고 명했다. 


 이후 성희안은 연산군에게 앙갚음을 당한다. 성희안은 그의 군사가 금표 안에 들어갔다고 해서 대죄해야 했으며 국문을 받고 결국 좌천된다. 또한 그가 지은 시가 졸렬하다고 다른 신하들 앞에서 핀잔까지 들어야 했다. 


 박원종과 성희안의 매개체로 신윤무가 있었다. 그는 종3품의 군자부정(軍資副正)으로서 연산군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다. 그는 평소에 근심하고 두려워해서 장차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 것을 우려했다. 

그는 박원종을 찾아가서 “왕 가까이에서 신임하는 신하들은 실상 마음이 다 떠나있다” “무용과 계략을 가진 이장곤 등이 먼저 반란을 일으킬 조짐이 있다” “그들에게 선수를 뺏길 수는 없다”라고 하면서 박원종의 결심을 앞당기게 했다. 

이장곤은 이극균의 천거를 받았다고 해서 고문을 받고 섬으로 유배를 갔으나 도망갔다. 이장곤은 가장 용맹해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연산군이 두려워했던 인물이다. 

 

박원종 성희안 신윤무의 마음이 서로 통하자 이조판서 유순정, 군기시 첨정 박영문 등 동조하는 관리들이 순식간에 늘어났다. 그동안 연산군의 폭정에 겉으로는 눈을 감았으나 마음 속 깊이 용암이 분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창덕궁 부감 (1947년, 미국의 life誌에 실린 모습)



연산군 12년 9월 2일 박원종 등은 여러 장수들과 부대를 나누어서 밤3경(밤11시~새벽1시) 에 창덕궁으로 향했다. 이 소식은 바로 퍼져서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 등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창덕궁으로 모이고 백성들과 군인들도 나와서 거리를 가득 메웠다.  

 

우선 한성판윤 구수영, 운산군 이계 등을 진성대군(중종) 집에 보내서 거사한 사유를 설명하고 군사로 하여금 호위하게 하였다. 또한 윤형로를 경복궁으로 보내서 성종의 두 번째 왕비이자 대비인 정현왕후 윤씨(중종의 어머니)에게도 거사 사실을 알리게 했다. 윤형로는 정현왕후의 사촌 오빠다.

 또한, 용감한 장수들을 선발해서 연산군의 충견 노릇을 했던 신수근, 신수영, 임사홍의 집에 각각 보내서 임금이 부른다고 핑계를 대고 쳐 죽였다. 일부의 무사들은 의금부 밀위청으로 가서 죄수를 석방시켰다. 


 연산군은 궁궐수비를 어느 왕보다도 엄격하게 했다. 연산군은 궁문을 지키는 수직군사들에게는 창과 칼을 차고 갑옷까지 입혔다. 궁궐 문마다 인원도 60명으로 늘렸다. 그런 군사와 장수, 지휘관들은 변란이 일어난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왕을 나 몰라라 내팽개치고 수로의 수채 구멍이나 담을 통해서 자신들의 살 길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던 승지 윤장 등 신하들도 바깥 사정을 살피고 오겠노라고 하면서 수채 구멍으로 달아났다. 이들이 궁궐을 얼마나 정신없이 빠져나갔는지 실족해서 뒷간에 빠진 자도 있었다고 한다. 박원종 등의 반정군이 궁궐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저항세력은 없었던 것이다. 


 다음 날 승지 한순, 내관 서경생을 창덕궁에 보내서 “옥새를 내 놓으시오”라고 예를 갖추니 연산군은 “내 죄가 중대하여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좋을 대로 하라”라고 하면서 시녀를 시켜서 상서원 관원에게 옥새를 내주었다. 연산군 12년의 폭정이 끝나고 박원종 등이 주도한 반정이 성공하는 순간이다. 


 박원종 등이 반정을 한 이유는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지만 결국은 연산군의 폭정에 대한 저항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연산군의 폭정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연산군은 사람을 자신의 기분에 따라서 벌레처럼 죽이기도 했다. 도저히 조선의 통치자로서 설명이 안 되는 망나니였다. 그 폭정에 겉으로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역사의 어느 순간 계기가 되어 폭정도 반정의 도도한 물결을 거스를 수 없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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