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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33) 숙종의 연애편지 ②인현왕후의 복위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8-10 20:49:21
  • 기사수정 2019-08-13 21: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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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장희빈은 차츰 지위가 높아간다. 숙원(종4품)에서 소의(정2품)로 승격되고 숙종 14년 원자를 낳는다. 이 원자는 세자로 책봉되어 조선의 제 20대 왕 경종이 된다. 장희빈이 낳은 아들이 임금이 되는 것이다. 

이듬해 숙종 15년 빈(정1품)으로 승격되어서 희빈이 된다. 궁녀가 후궁이 되어 오를 수 있는 최고 직위까지 오른 것이다. 그만큼 임금의 사랑이 깊음을 알 수 있다. 인현왕후는 자손이 없었다. 


 장희빈과 같이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오른 사람이 있다. 그의 오빠 장희재다. 그의 부인은 노래를 잘하는 기녀였다. 장희재는 궁궐 포도부장으로 등장해서 무신들이 들어가기 어려운 군기시와 사복시의 자리를 꿰차고 열흘이나 보름사이에 승진을 거듭한다. 마침내 장수가 되는 총융사가 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시장에서 입신출세해서 장수의 소임을 맡아 미워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장희빈의 아버지 장형(張炯)도 영의정으로 증직되고 다시 옥산부원군, 어머니는 영주부부인으로 추증된다. 그러나 부원군과 부부인 교지는 5년 후 장희빈의 몰락과 함께 불살라진다.


 장희재가 무과에 급제한 기록이 없음은 물론 무식했다. 장희빈이 숙종의 원자를 낳은 무렵으로 해서 그의 주변에 문과 급제자 출신의 고위관료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조선은  사농공상의 신분적 차별이 있었다. 선민의식을 갖고 있던 양반이자 선비들이 자신들이 무시했던 그 장사치 주변으로 모인 것이다. 게다가 그의 어머니는 남의 집 종이었다. 

사관은 “그 무리들의 권세에 모든 사람들이 무서워서 떨었다”라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이들은 인현왕후와 그 세력들에게 들이댈 비수를 감추고 있었다. 

 

세자 책봉 문제가 불거졌다. 장희빈이 낳은 원자를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세력과 인형왕후에게 시간을 더 줄 필요가 있다는 세력으로 나누어졌다. 숙종은 장희빈 세력의 손을 들어준다. 

인현왕후 세력은 풍비박산이 난다. 인현왕후도 왕후에서 폐서인이 되어 쫓겨난다. 장희빈 세력도 인현왕후를 쫓아낼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숙종이 인현왕후의 악행(?)을 열거하며 쫓아내려는 의도를 보이자 거의 반대를 한다. 

“하루아침에 이런 분부는 당황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부인들은 투기를 합니다. 서서히 진정시켜서 감화시켜야 합니다.”

“어리석지 않고 귀먹지 않으면 가장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너그러이 참는 도리를 다하여야 하지 않습니까?”  


신하들의 반대에도 인현왕후를 쫓아내는 데는 숙종의 의지가 강했다. 위의 문장에 악행에 (?)를 단 것은 민 씨가 왕후로 책봉되거나 복위 될 때 온갖 칭찬하는 말과 너무나 대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불러들이는 수단으로 손 편지를 이용한 것이다.


숙종대왕실록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숙종은 편지를 보내기 이틀 전 내시를 폐서인 신분으로 전락한 인형왕후의 본가로 보냈다. 바깥문이 잠겨있었다. 내시가 문을 열어달라고 열쇠를 청했다. 그러나 인현왕후는 여염집이 나지막해서 바깥에서 안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혹시 사람의 출입이 염려되어 문을 봉쇄했고 임금의 명이 있더라도 따를 수 없다고 했다. 내시가 두세 번 다시 문을 열어 달라고 청하였으나 인현왕후는 요지부동이었다. 


 내시는 다시 궁궐에 가서 임금에게 그 사정을 아뢰었다. “집을 호위하겠다. 외부인 출입은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라는 임금의 명령을 받아왔다. 인현왕후도 계속 거절할 수 없어서 열쇠를 주었다. 내시가 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가니 풀이 우거져 인적이 끊어진 폐허 같았다. 내시뿐만 아니라 같이 간 군졸들도 그 광경을 보고 저절로 눈물이 흐를 정도였다. 

내시가 다시 임금의 허락을 받아서 백성들을 동원해서 마당의 풀을 뽑았다. 군사들로 하여금 집을 지키게 했다. 

 

내시가 인현왕후가 옮겨 갈 경복당에서 필요한 생활 물품을 올렸으나 받지 않았다. 또한 상궁과 시녀들이 가지고 간 정갈한 의복을 드렸으나 입을 수 없다고 했다. 미천한 신분의 죄인이 국가의 물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러한 사정을 임금에게 다시 아뢰었다. 숙종은 두 번째  편지를 쓴다. 

 “어제 보내준 답서를 읽으니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소. 기쁨이 넘쳐서 열 번이나 보고 또 보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소. 경복당으로 거처를 옮기고 필요한 물품을 내리는 것은 그동안의 후회에 대한 자그마한 정성이오. 조정 대신들도 나와 뜻을 같이하오. 너무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보내준 의복도 편히 입고 옥교(玉轎, 가마)를 타고 오시오. 내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이만 줄이오. 다시 한 번 보내준 물품을 모두 받고 답서를 바라오.”

 

숙종은 인현왕후를 쫒아낼 때 “바른 덕은 없고 오히려 시정잡배의 패려스러운 행실만 남아 있다” “투기하는 마음으로 임금을 능멸하는 간악한 짓을 한다”라고 악담을 했던 말들은 다 사라졌다. 인현왕후의 답서를 “열 번이나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대목에서는 임금이라기보다는 지아비로서 다감한 모습을 보여준다. 

 

인현왕후도 답서를 썼다. “필요한 물품과 감당할 수 없는 옷까지 내리셔서 황공스러워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또한 옥찰(玉札)을 내리셔서 간절한 말씀을 전하시니 천은이 망극해서 땅에 엎드려 흐느낍니다. 임금의 성의를 사양하는 것은 더욱더 큰 죄입니다. 그러나 옥교와 의복의 의장절목은 너무나 분수에 넘쳐서 감당하기 어려워 끝내 받들기가 어렵습니다. 성상께서 굽어 살피시어 모두 도로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면 죄 많은 폐서인이 하늘같은 성덕을 입어 조금이라도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인현왕후는 임금의 태도 변화에 북받치는 것을 억누르면서도 “옥교와 의복을 받들 수 없다”라고 해서 뭔가 두려움이 남아 있음을 내비치고 있다. 

 

숙종은 세 번째 편지를 쓴다. “그대의 손 편지를 잇달아 보니 얼굴을 대한 듯해서 너무 기쁘고 가슴이 후련하오. 밤은 깊어 가는데 번민이 떠나지 않는구려. 너무 사양하지 말고 좋은 날에 들어오기를 바라오. 또 회답을 주오.” 

인현왕후도 바로 답서를 올린다.

“오늘 또 옥찰을 받으니 황공스럽고 조심스러울 뿐입니다. 임금이 명령을 두세 번 간절하게 내리시는데 그 뜻을 어기는 것은 더욱더 큰 죄를 짓는 것임으로 저의 개인 사정을 마냥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 내리는 은혜는 너무나 감당하기가 어려워 더욱더 황공스럽고 감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마침내 인현왕후도 5년 동안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의 빗장을 열고 임금의 간절한 바람을 따르겠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숙종도 인현왕후를 인도해서 모셔올 상궁에게 단단히 일러둔다. “어제 내린 의복을 입궁할 때 입지 않으면 너희들은 중죄가 있을 것이다.” 


 인현왕후는 평소에 입은 명주 옷 위에 임금이 내린 웃옷을 걸치고 옥교를 타고 경복당으로 간다. 인현왕후가 돌아오는 길은 인산인해였다. 사대부에서 아래의 종들까지 배웅을 나와서 기뻐서 날 뛰기도 하고 환희의 눈물도 흘렸다. 가는 길이 막혀서 ‘비켜라’고 외쳐도 밀려오는 인파를 막을 수 없었다. 모두들 길옆에 서서 궁으로 돌아가는 인현왕후를 따뜻한 마음으로 보내고 있었다. 또한 눈물바다가 된 곳이 있었다. 

인현왕후가 5년 동안 거처한 곳이다. 몇 날 동안 백성들의 방문지였다. 백성들은 왕후에서 폐서인으로 전락한 왕후 5년의 삶의 흔적을 찾아보고 그 모습에 눈물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숙종은 경복당에서 인현왕후를 기다렸다. 옥교가 이르렀다. 궁녀가 발(廉)을 걷었다. 인현왕후가 내려 엎드려서 사죄하려는데 숙종이 붙들어 일으켜서 안으로 들어갔다. 숙종이 자리에 오르도록 권했으나 인현왕후는 자리에 오르지 않고 다시 죄를 빌었다.


숙종은 “모든 것은 내가 경솔했던 허물이다. 내가 번번이 충언을 살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어찌 그대가 빌 만한 죄가 있는 것인가? 그대는 더 이상 겸양을 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인현왕후는 다시 한 번 스스로 물러나는 말을 아뢨으나 숙종은 “나는 이미 그대의 억울한 심정을 다 알았고 그 뉘우침을 밝히지 않았소.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난 것은 다 이치에 합당하오. 그런 말을 하지 않기를 바라오”라고 두세 번 타이르듯이 반복했다. 그리고 세자로 하여금 인사를 하게했다. 세자는 장희빈이 낳았으나 인현왕후의 아들로 적을 옮겼다.


 이날 밤 숙종은 궁녀들에게 명해서 성찬을 차리게 했다. 인현왕후 부모님의 빼앗은 봉작(封爵)도 회복시켜준다. 봉작은 내·외명부에게 내리는 벼슬을 말한다. 또한 후궁 영숙을 밖으로 내치고 장희빈은 별당으로 물러가게 했다. 장희빈은 이날까지 엄연히 국모로서 궁궐의 안주인이었다. 

 숙종은 인현왕후에게 대전(大殿) 안으로 들어가기를 청하였으나 인현왕후는 굳이 사양하고 엎드려서 일어나지 않았다. 임금은 나가면서 상궁에게 또 일러둔다. “중전을 보필해서 침전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면 너희들은 벌을 받을 것이다.”

 궁녀들은 인현왕후를 좌우에서 시위하고 부축해서 양심합(養心閤)으로 모셔가서 침실을 마련했다. 

 

이때부터 왕비는 세자에게 도타운 사랑을 베풀고 세자는 어머니를 위해서 효성을 다함으로 비로소 “나라의 끝없는 복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사관은 평하고 있다. 그러나 별당으로 물러나 있는 장희빈은 조용하지 않았다. 뒤집기를 시도한다. 그것이 결국에는 자신에게 더 큰 비극으로 다가온다.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은 궁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자신의 개인적 의견을 다는 경우가 있다. 숙종의 이러한 심경변화에 대해서 사관은 “성인(聖人)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허물이 있다. 그러나 허물을 고치면 그 허물이 없는 것과 같다. 임금이 인현왕후를 쫒아낸 것은 큰 허물이었다. 그 허물을 뉘우쳐서 고쳤기 때문에 하늘의 이치와 인심이 따를 수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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