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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32) 숙종의 연애편지 ①인현왕후와 장희빈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8-04 07:27:51
  • 기사수정 2019-08-09 17: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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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숙종은 조선의 제 19대 왕이다. 45년 10개월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다. 51년 7개월 왕위에 있은 영조에 이어 두 번째다. 제 18대 현종의 적장자이자 외아들로서 제대로 된 세자 교육을 받고 순탄하게 왕이 된다. 부왕 현종은 조선의 27명 왕 중에서 단종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종은 15년 3개월 임금으로 재위하면서 명성왕후 김씨와 1남 3녀를 두었다. 공주 2명은 일찍 죽는다. 


 숙종의 재위기간에는 정치적 변동이 심했다. 정파를 같이하는 사람끼리 모이고 뜻을 달리하는 세력들을 배척하는 붕당이 숙종 대에 절정에 이른다. 숙종은 서로 편을 나누어서 싸우는 것이 싫었다. 한 쪽 편만 쓰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해서 한 쪽의 손만 들어주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폐단이 있었다. 신하들 중에는 탕평을 건의했으나 오히려 간극이 더 벌어졌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 숙종의 성격도 한 몫 했을지도 모른다. 숙종은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결정을 자주 내렸고 정치 세력에게도 이리 저리 흔들렸다. 


 붕당의 시작은 조선의 제 15대 왕 선조 대 부터다.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해서 학파가 형성됐다. 학문적 논쟁이 그 출발점이었다. 이러한 학파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대북 소북 노론 소론 등 여러 갈래로 세력을 형성해서 붕당으로 발전됐다. 


학문적 논쟁으로 시작해서 정치적 세력으로 발전된 것이다.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숙종 대에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 강했다. 대표적인 것이 숙종 15년(기사년)에 일어난 기사환국이다. 장희빈이 낳은 원자의 세자 책봉문제로 촉발되어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시기와 질투 등도 겹쳐지면서 각각 세력 간의 이전투구가 심했다. 

유학자나 조정 대신들이 죽거나 유배를 가고 다시 복권되어 또 상대를 누른다. 이에 따라서 인현왕후도 궁에서 쫓겨나 폐서인이 되었다가 다시 궁으로 들어와 왕비로 복권되고 장희빈은 빈에서 왕비가 되어 국모로 있다가 다시 빈으로 강등되어 결국에는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다. 숙종의 정치에는 이런 갈팡질팡이 있었다.



명릉(숙종과 인현왕후.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사진=네이버이미지

 

숙종 20년 4월 12일 자신이 쫒아낸 인현왕후 민 씨에게 손수 편지를 쓴다. 쫒아 낸지 5년 만이다. 숙종은 8년 여 동안 함께한 아내이자 왕비를 쫒아낸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면서 다시 만나고 싶다는 절절한 사연을 나라의 왕으로서 지아비로서의 솔직한 심정을 사연에 담았다. 


“간신들에게 농락당해서 잘못 처분되었다. 그 잘못을 곧 깨달아서 그대의 억울한 사정을 깊이 이해하고 세월이 갈수록 답답한 심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때때로 꿈속에서 만나면 내 옷을 부여잡고 눈물을 비 오듯이 흘리는 그대의 모습에 문득 잠에서 깨었다. 옛 인연을 다시 이으려고 자나 깨나 잊지 않았으나 나라의 결정을 쉽게 되돌릴 수 없어서 머뭇머뭇한 것이 6년(실제로는 5년)이 되었다. 이제 옛 신하도 다시 등용하고 그대도 별궁으로 옮겨서 다시 만날 기약이 없겠는가?”

숙종은 인현왕후 민 씨를 쫓아낸 이유를 간사한 신하들의 탓으로 그 잘못을 돌리고 이제 그 잘못을 깨달았으며 꿈속에서 나마 만났던 소회와 다시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고 있다. 


 인현왕후도 바로 답서를 쓴다. “사람 사는 세상에 낯을 들고 사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엄한 벌을 내리셔서 마음 편히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뜻밖에 옥찰(玉札)을 받으니 감당할 수 없고 감격의 눈물만 나옵니다. 별궁으로 옮기라는 명은 더욱이 받들 수 없으니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5년 만에 보내온 숙종의 편지에 인현왕후의 억누른 감정이 북받침을 느낄 수 있다. 

 

숙종의 시계를 5년 전으로 되돌려 보자. 숙종 15년 인현왕후 민 씨의 생일을 앞두고 축하하려는 신하들의 문안인사를 하지 못하게 한다. 그 대신 영의정을 비롯한 삼정승, 좌우참찬, 그리고 주요 대신들 앞에서 “국가가 혼란에 빠지고 흥하고 망하는 것은 왕비에 달렸다. 지금 왕비전에는 투기하는 마음으로 분노와 원망에 차 있다. 내 나이 서른 살에 첫 원자가 탄생하였으나 경사스럽게 여기는 마음보다 노여운 기색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런 사람을 국모라고 할 수 있는가?” 


여기서 왕비는 숙종의 두 번째 왕후 인현왕후 민 씨다. 숙종의 첫 번째 왕후 인경왕후 김 씨는 공주 두 명을 낳고 스무 살에 승하한다. 두 공주도 일찍 죽는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쫒아내려는 속셈을 대신들에게 드러낸 것이다. 

이 때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은 장희빈이었다. 그녀는 이로부터 6개월 전 숙종에게 처음으로 원자를 안겨드렸다. 인현왕후와 8년 여 결혼생활 동안 생기지 않은 아이였다. 숙종의 갑작스런 결정에 많은 신하들이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소귀에 경 읽기였다. 상소를 올린 신하들은 파직당하고 유배를 간다. 이어서 인현왕후 민 씨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희빈 장 씨를 왕비로 삼겠다는 전지를 내린다. 


 장희빈. 그녀는 역사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장희빈은 역관 장현의 종질녀, 사촌 형제의 딸로서 나인으로 뽑혀 궁에 들어왔고 얼굴이 아름다웠다. 숙종이 장희빈을 만난 것은 숙종 6년 스무 살이었다. 숙종은 14살에 왕위에 오른다. 장희빈은 숙종보다 2살 위로 인현왕후보다 1년 여 앞서 숙종을 만난다. 

숙종 6년 11월 1일 조선왕조실록은 날씨와 더불어 장희빈의 등장을 연관시키고 있다. “날씨가 침침하였다. 흰 기운이 서쪽으로부터 중천에 뻗쳐서 그 모양이 혜성같고 여러 날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이 즈음에 일개의 궁녀 장녀(張女,장희빈)가 임금의 총애를 받아서 나중에는 왕비의 지위를 빼앗아 왕후에 오르고 국가에 화란을 초래한다. 이 하늘의 조짐이 우연이 아니었다.”

 

장희빈은 궁에 들어온 후 숙종의 눈에 띄어서 은총을 입지만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에 의해서 곧 쫓겨난다. 명성왕후는 며느리 인현왕후에게 “(장녀는) 매우 간사하고 악독하다. 주상은  평일에도 희로(喜怒)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난다. 주상이 그녀에게서 꾐을 받으면 국가의 화란을 초래한다. 후일에 나의 이 말을 명심하라”라고 장희빈을 쫒아낸 이유를 단단히 일러둔다. 


인현왕후는 시어머니의 예리한 지적을 잊었다. 명성왕후가 돌아가신 후 인현왕후는 임금의 은총을 입은 궁녀(장녀)를 밖에 둘 수 없다고 해서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자고 숙종에게 건의한다. 

시어머니가 쫒아낸 장희빈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인 것은 인현왕후였다. 제 발등에 도끼를 찍은 것이다. 숙종은 장녀를 바로 불러들이고 숙원으로 삼고 총애하기 시작한다. 숙원은 종4품으로 후궁의 여관(女官)이 되는 여덟 단계 중 첫 관문이다. 

 

장희빈이 다시 궁으로 들어온 후 홍문관 이이명은 임금에게 <통감강목>을 강의하면서 중국의 후궁 조비연에게 푹 빠져 나라를 망친 성제(成帝)의 예를 들어 “색을 조심하라” 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총애하는 장 씨(張氏, 장희빈)를 염두에 둔 가르침이었다. 

부교리 이징명도 상소를 올린다. “올해의 천재지변과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외척의 발호와 여알(女謁)의 연유 때문입니다. 장희빈을 내쫒아서 맑고 밝은 정치를 이끌어야 합니다”라고 간언을 한다. 여알은 임금에게 총애를 받는 여자가 사사로이 임금을 뵙고 청탁하는 것을 말한다. 


일부 신하는 일찍이 장희빈에게서 화란의 씨앗을 보고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숙종은 신하들의 이러한 간언에 분노했고 파직시킨다. 장희빈에 대한 간언은 숙종의 귀에 들어오지 않은 단계까지 이른 것이다.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종아리를 때리는 장면은 드라마에 꼭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 기초하고 있다. 어느 날 숙종이 장희빈에게 장난을 걸자 일부러 왕비가 거처하는 뜰로 뛰어 들어와서 “제발 나를 살려주십시오”라고 엄살을 피운다.

 인현왕후의 기색을 살피기 위한 장희빈의 수작이었다. ‘너는 마땅히 전교를 잘 받들어야만 하는데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가 있는가?’ 라고 인현왕후가 야단을 친다. 이후로 장희빈은 인현왕후에 대해서 교만하고 공손하지 않았고 심지어 불러도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종아리를 때린다. 


장희빈은 더욱더 원한과 독기를 품고 인현왕후를 모함하기 시작한다. 시어머니 명성왕후의 지적대로 오만하고 방자한 장희빈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모습이다.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다스리는 데 한계를 느껴서 다른 후궁을 선발했으나 숙종의 눈길은 여전히 장희빈에게만 갔다. 


 장희빈은 점점 거침이 없었다. 숙종은 장희빈을 위해서 별당을 지어준다. 외부 사람들 모르게 목수를 불러들이고 재목을 아침과 늦은 저녁에 운반하게 한다. 사헌부에서 이를 지적하자 그런 일이 없다고 딱 잡아떼고 공사는 계속하게 한다. 사패노비도 1백 명을 붙여준다. 사패노비는 왕실의 종친이나 국가에 공이 있는 공신에게 내리는 노비다. 장희빈은 인사에도 개입한다.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 주변에는 많은 무리가 모인다. 장희재는 낮은 직급이었으나 그에게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조사석은 이조판서에서 우의정이 된다. 숙종은 조사석을 책망하기도 했고 평소에 그렇게 신임이 두텁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숙종은 조사석을 국가를 위해서 정성을 다한다고 느닷없이 칭찬을 하고 정2품에서 정1품으로 2단계를 승격시켜서 정승에 오르게 한 것이다.

 그 배경에는 장희빈의 어머니가 있었다. 장희빈의 어머니는 조사석 처갓집의 종이었다. 조사석은 젊었을 때 그 어머니와 사사로이 정을 통했다. 장 씨에게 시집을 간 후에도 어머니는 조사석의 집을 자주 왕래했다. 인망이 없는 조사석이 정승이 된 것은 궁중 깊숙이 후궁의 지원에 의한 것이라고 사관은 기록하고 있다. 


김만중 유허지(경남 남해군 노도) 사진=네이버이미지 


<서포만필> <사씨남정기><구운몽>을 지은 서포 김만중은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숙종에게 밝히다가 경남 남해의 노도(櫓島)로 유배를 간다. 숙종은 어느 날 지경연사 김만중에게 조사석이 불안해하는 이유를 묻는다. 지경연사는 정2품 이상으로 학식이 풍부한 관리에게 내리는 벼슬이다.  

 김만중은 “후궁 장씨(張氏, 장희빈)의 어머니와 조사석은 친밀했습니다. 조사석이 우의정이 된 것은 여기에 연줄을 댄 것이라고 온 나라 사람들은 다 아는데 전하만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숙종은 “재주도 없고 덕도 박한 임금이 신하에게 이러한 말을 들으니 면목이 없다. 그 말의 근거를 대라. 가만 두지 않겠다”라고 펄펄 뛴다. 김만중도“전하의 질문에 답을 했는데 그 말의 근거를 물으신다면 죽음으로 달게 받겠습니다. 의금부로 가서 명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는 숙종이 인현왕후를 쫒아내고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한 사건에 대해서 숙종을 깨우치기 위해서 지은 한글소설로 남해의 노도에서 지은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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