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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31) 궁궐의 여인들 ③ 권력을 공유한 궁녀들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7-27 22:47:34
  • 기사수정 2019-08-08 14:0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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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영조 대에 양민을 궁녀로 추천한 사람, 자신의 서녀를 궁녀로 삼도록 청탁한 전 장흥부사 김하정 그리고 서질(庶姪)을 궁녀로 추천한 첨사 김주정은 모두 유배를 간다. 양반이나 양민의 자제는 궁녀의 자격이 아닌 잘못된 추천이었다. 이러한 추천으로 들어온 궁녀들도 모두 내보냈다. 도승지 조현명은 영조에게 정말로 모두 내보냈느냐고 조심스럽게 다시 물을 정도로 미인도 있었다. 양반들이 자신의 서녀나 양민을 신분을 속여서라도 궁녀로 들여보내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의 왕은 법과 제도를 세우고 행정을 명령한다. 입법 사법 행정을 총괄하는 것이다. 상과 벌 그리고 사면도 임금을 통해서만 나간다. 왕은 지존이고 최고 권력자다. 왕과의 거리만큼 권력은 비례하는 것일까? 국가의 공식적인 조직은 아니지만 왕의 가까이에서 권력을 공유한 궁녀들이 있었다. 


영조어진(국립고궁박물관 보물 제 932호)


 

영조는 숙종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궁녀였다. 최 씨다. 최 씨는 숙종에게서 3명의 아들을 낳는다. 영조의 형과 동생은 일찍이 죽는다. 최 씨는 영조를 낳은 1년 후 숙의에서 귀인이 된다. 숙종은 노산군을 단종대왕으로 복위시킨 경사를 축하해서 귀인 최 씨를 숙빈으로 승급시킨다. 숙빈 최 씨는 창덕궁 옆 이현에 크고 너른 집도 갖게 되지만 아들이 임금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먼저 죽는다. 영조는 왕이 된 후 어머니를 위한 사당을 경복궁 북쪽에 짓는다. 육상궁(毓祥宮)이다. 영조는 육상궁에 어머니의 신위를 모시고 자주 찾아서 효를 다한다. 최 씨는 궁녀로 들어와서 아들이 임금이 되고 죽었어도 단독의 사당을 갖게 되었다. 


 영조가 어머니의 사당을 참배하는 것은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호위하는 군졸들은 입구에 문을 만들어 놓고 표신을 갖고 있는 신하만 들여보내고 대신들은 사당 문 밖에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여기에 말고삐를 끄는 말구종을 앞세워 말을 타고서 대신들을 지나가는 세 명의 궁녀가 있었다. 모두를 해괴하게 생각했으나 사헌부나 사간원의 대간조차도 아무 말이 없었다. 영조 3년의 일이다. 후궁의 아들이 임금이 되었으니 자신들도 장차 세자를 낳을 수 있다는 오만함 때문이었을까? 이틀 후 승지 나학천이 상소를 올려서 겨우 사대부의 체면치레를 했다. 


 중국의 고전 <예기(禮記)>에 “임금이 타는 말에 대해서는 그 나이를 논하거나 먹는 풀을 발길로 차도 벌을 받는다”라고 했다. 그런데 임금의 말을 허락도 없이 당당히 탄 조선의 관리가 있었다. 천민 출신에서 사직(司直)이 된 홍유근이다. 사직은 근무하는 부서에 따라서 종5품과 정8품이 있다. 그는 임금의 말을 관리하는 부서에도 근무를 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임금의 말을 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간원에서 불경죄로 공명정대하게 벌을 주라고 세종에게 요구를 했다. 불경죄는 사형까지 처벌 할 수 있었다. 세종은 홍유근이 자리를 물러나게 하는 것으로서 마무리를 짓는다. 홍유근의 누이동생이 궁녀이고 그도 세종을 시종했던 것이 배경이었다. 

 

단종 대에 종 김질동은 양민으로 되고 종 파독은 부역을 면한다. 모두다 법적인 근거가 없었다. 김질동은 임금의 유모인 봉보부인과 배 다른 형제였고 파독은 상궁 박 씨의 올케 언니인 것이 이유였다. 


 중종 대에 상궁 박 씨는 자신의 삼촌까지 친척 10여명을 양인으로 만든다. 이것은 조정대신들과 논의 하지 않은 매우 이례적인 왕의 결정이었다. 대간은 “법적인 근거가 없다”고 다시 천민으로 환천해야 된다고 상소를 올리고, 임금의 공부 스승인 경연관과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도 “임금은 개인의 정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환천을 요구했다. 또한 신하들은 부왕 성종 대에 완성된 <경국대전>을 따르라고 압박했다. 그러나 법적 근거와 타당한 논리를 갖고 있는 조정대신보다 임금의 특은(特恩)을 입은 상궁 박 씨가 이긴다. 상궁 박 씨는 세자를 보육하는 보모였다.


 궁녀의 위세가 하늘을 찌른 것은 조정의 공식 조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연산군 대다. 이 정점에는 장녹수가 있다. 장녹수는 도저히 임금이라 할 수 없는 연산군 대의 별종이다. 장녹수는 제8대 예종의 둘째 아들 제안대군의 계집종이었다. 그 이전에는 집이 가난해서 몸을 팔아서 생활을 했고 시집도 여러 번 갔었다. 제안대군의 집에 안착해서 노비와 결혼해서 아들을 하나 두었다. 노래를 워낙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궁궐에서 노래와 춤을 맡는 창기(娼妓)가 되었다. 연산군의 귀에 들어갔다. 나이는 30세였지만 16살로 보이는 앳된 얼굴로 바로 숙원이 되었다. 숙원은 내명부의 종4품이다. 노비에서 종4품이 된 것이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장녹수 등의 궁녀가 자신의 본가를 갈 때 왕의 행차에 버금갔다. 의금부의 나장 10쌍이 앞길을 정리했고 궁궐을 호위하는 내금위와 선전관이 양쪽에서 길을 인도하며 그 뒤로 내관, 승지, 주서가 뒤따랐다. 주서는 승정원일기를 기록하는 관리로 늘 왕 옆에서 사관과 같이 그 날 일어난 일을 기록하는 것이 임무다. 왕 옆에서 국가의 일을 기록하는 관리에게 궁녀를 따르게 한 것이다. 궁녀가 집에 도착해서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따라온 조정의 신하에게 비단 등을 내려 주었다. 마치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품을 내려 주는 모습이다. 승지 등은 “신이 무슨 비단을 받아왔습니다”라고 복명을 해야 했다. 장녹수 등의 궁녀가 나라의 공식 조직을 무너뜨리고 유세를 떤 것이다. 폭군 연산군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연산군 유배지(강화군 교동) 사진=네이버 이미지


장녹수는 연산군과 사이에 딸을 낳는다. 이름은 영수였다. 임금의 딸이니까 유모를 두었다. 유모의 아들은 노비 업무를 담당하는 장례원의 종이었다. 이름은 종이(從伊)였는데 일본의 사신이 머무른 동평관의 창고지기를 영원히 맡도록 한다. 이 자리는 이익이 생기는 곳으로 담당자가 되려고 서로 다투는 곳이다. 사헌부에서 한 사람에게 영원히 전권을 맡기면 국가에서 금지하는 물품을 사사로이 매매하는 폐단이 나올 것이라고 반대를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장녹수의 형부 김효손은 녹사에서 무반이 된다. 무반은 무과의 과거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녹사는 과거시험이 어렵거나 낮은 신분의 출신이 관청에 대체로 10여 년 간 무보수로 일을 하고 임기를 채운 다음 품관으로 진출한다. 녹사에서 무반이 되는 것은 인사의 절차가 무시된 것이다. 이후 김효손은 계속 상식을 뛰어넘는 진급을 하고 부당한 인사라는 상소는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김효손은 4년 후 중종반정 대에 박원종의 반정군에 의해서 죽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장녹수의 외모는 중인(中人)정도를 넘지 못했으나 교묘하게 남을 속이거나 요사스럽게 아양 떠는 것은 견줄 사람이 없다고 기록돼 있다. 그래서 그런지 장녹수가 연산군을 조롱하고 노예처럼 욕을 퍼부어도 연산군은 장녹수만 보면 기뻐서 웃었다고 한다. 상도 벌도 모든 것이 장녹수의 입에 달린 것이다.


 궁녀 전향과 수근비는 모습이 고왔다. 그 고운 모습이 장녹수에게는 거슬렸다. 장녹수의 참소로 투기가 심하다고 해서 그들의 부모, 형제, 친척까지 능지처참을 당한다. 좌참찬 홍귀달은 낮은 신분의 출신이었으나 힘써 공부를 해서 급제하고 문장이 굳세고 법도가 있어서 재상까지 올랐다. 연산군에게 여러 번 간언을 올리다가 경기 관찰사로 좌천이 된다. 그 때 창고지기를 해 달라는 인사 청탁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장녹수와 연결된 사람이었다. 홍귀달은 귀양을 가서 죽는다. 모든 사람이 슬퍼했다고 한다. 

 

반면 장녹수에게 인사 청탁의 뇌물을 갖다 바치는 사대부도 있었다. 그녀는 전답이나 노비 등 재산이 불어났다. 연산군도 그녀를 위해서 나랏돈으로 집을 지어준다. 연산군은 녹수의 집 짓는 현장을 직접 가서 관리들에게 빨리 지으라고 독촉하기도 했다. 또한 녹수의 집 화재를 염려해서 주변의 인가도 철거시킨다. 중종반정이 없었더라면 그 악행의 끝이 어디였을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장녹수도 중종반정으로 참형을 당한다. 조선이 500년 이상 지속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자체 정화기능이 작동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선의 대부분 왕은 내시와 궁녀의 아첨을 경계했다. 신하들도 임금과 고전을 공부하면서  “하루 동안 내시와 궁녀보다 현명한 사대부와 친근하게 지내는 시간이 많으면 좋은 덕을 성취하게 된다” “오직 여자와 소인은 기르기가 어렵다. 가까이하면 공손하지 아니하고 멀리하면 원망한다”는 정자나 공자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 특히 여알(女謁)을 경계했다. 여알은 임금에게 총애를 받는 여자가 사사로이 임금을 뵙고 청탁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폭군 연산군을 경험한 신하들은 중종을 올바른 품성의 왕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좋은 글귀를 공부하도록 한다. 중종도 홍문관으로 하여금 병풍에 좋은 글귀를 써서 올리게 했다. 중종의 정심잠(正心箴) 즉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경계의 글의 일부다.

 “마음은 위태로워서 외부의 물욕이 스며든다. 귀는 소리에 끌리고 눈은 색에 방탕하고 몸은 평안함에 안주한다. 임금은 구중궁궐 깊숙이 내시들과 비단옷 미인들을 상대해서 언제나 가까워 친할 수 있고 올바른 선비는 드물게 왔다가 쉽게 물러간다. 아첨하는 자가 어느 사이에 틈을 타고 기교를 부려서 눈을 즐겁게 하니 결국 나라가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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