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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30) 궁궐의 여인들 ② 궁녀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7-20 21:33:58
  • 기사수정 2019-07-22 16:2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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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궁녀 45명을 내보내다 – 세종 26년

궁녀 25명을 내보내다 – 숙종 11년 

궁녀 45명을 내보내다 – 영조 26년

 

조선의 왕은 임금으로서 하늘과 통해야 했다. 백성의 벼농사에 필요할 때 비가 오지 않는 가뭄이나 반대로 벼 수확을 앞두고 너무 많은 비가 오면 임금의 부덕의 소치였다. 하늘의 재해를 달래는 방법의 하나로 조선은 궁궐의 궁녀를 내보냈다. 궁녀들의 원한을 풀어서 음양의 조화를 맞추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반면 자연재해나 자신이 모시는 주인의 사망 등 특별한 사유 없이 궁녀가 밖으로 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세종의 다섯 째 아들 금성대군 이유는 의빈 권 씨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 살고자 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의빈 권 씨는 나이 70에 병까지 들어서 질병가(疾病家)에 살았다. 질병가는 궁녀나 나인들이 병들면 살던 대궐 밖의 집이었다. 금성대군이 질병가를 가서 보니 너무 누추하고 습기가 차 있었다. 

금성대군은 어린 시절 자신을 돌보아준 의빈 권 씨의 은혜를 갚고자 자신의 집으로 모셔 와서 치료도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금성 대군이 허락을 받지 못했던 사유는 세종 대에 궁녀에 대해서 세운 금령(禁令)때문이었다. 세종은 궁녀의 출입에 대해 승정원의 허락을 받아서 의식을 갖춰서 나가게 하고 자고 들어오지는 못하게 했다. 궁궐안의 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하는 조치였다.  


 궁궐에서 생활하거나 업무를 보는 여인을 통칭해서 궁녀라고 한다. 후궁 나인 시녀 혹은 궁인도 이에 해당한다. 

세부적으로 보면 궁녀도 다양했다. 궁궐 여인들의 정점에는 왕비가 있다. 그 아래로 관직을 갖는 여인을 명부(命婦)라고 한다. 명부는 봉작을 받은 부인이다. 명부는 내명부(內命婦)와 외명부(外命婦)로 나눈다. 

 내명부는 궁궐에서 품위를 갖춘 여관(女官)으로 궁녀이다. 빈(嬪)ㆍ귀인(貴人)ㆍ소의(昭儀)ㆍ숙의(淑儀)ㆍ소용(昭容)ㆍ숙용(淑容)ㆍ소원(昭媛)ㆍ숙원(淑媛) 등 8단계의 품계가 있다. 빈은 1품이고 숙원은 종4품이다. 왕의 후궁으로 들어오거나 궁녀로 들어와서 왕의 승은을 입은 여인들이 받을 수 있는 봉작으로 단독의 거처를 가질 수 있었다. 여종도 거느렸다. 

그리고 월봉을 받는 여관으로서 궁녀가 있다. 9품의 사식(司飾)에서 3품의 찬덕(贊德)까지다. 궁녀들의 실질적 책임자는 5품인 상궁이다. 상궁도 여종을 거느린다. 상궁 등은 근무 연수에 따라서 받는 품계이지만 왕의 눈에 띄어서 특별 승진을 할 수도 있었다.  


 이 외에도 궁궐에서 잡일을 하거나 여관을 도와주는 궁녀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방자((房子)가 있다. 방자는 각 관청의 비자(婢子)에서 뽑는데 여관을 도와주는 여자 종으로서 잔심부름을 한다. 무수리는 세숫물 등을 담당하는 여자 종으로서 조선초기에는 결혼과 출퇴근을 했다. 태종 대에 청소를 담당하는 남자 종 파지(巴只)와 무수리를 통해서 궁중의 말이 새 나가자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제도를 바꾼다. 또한 왕대비나 왕비의 거동을 수행하는 시녀들도 있었다. 


성종 대에 방자, 무수리, 시녀들에게 월봉을 주라는 기록은 있으나 액수는 기록에 없다. 

“궁녀의 수는 많아야 20명에 불과하니......”- 태종 15년

“세종대왕 대 궁인은 1백 명 미만이었고......”- 숙종 12년

“환관과 액정서 자리 108석을 줄이고 궁인도 이에 준해서 줄여라 ......” - 정조 즉위년


이들의 기록으로 보아서 궁녀의 숫자는 100여 명 전후로 보인다. 또한 세종 대에 궁궐을 출입할 수 있는 신부(信符)를 발행했다. 대전(大殿) 즉 임금의 전각에는 남자 종 376명 여자 종 12명이고 공비전(恭妃殿) 즉 왕비의 전각에는 남자 종 104명 여자 종 15명이며 의빈전(懿嬪殿)은 남자 종 74명이고 여자 종 9명이었다. 전체적으로 남자 종이 554명인데 비해 여자 종은 36명에 불과했다. 남자 종과 여자 종의 큰 숫자 차이를 볼 때 궁녀가 그렇게 많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복궁 소주방(수라간) 

 

외명부는 왕이나 세자의 여자 자식, 왕비의 어머니, 임금의 유모(봉보부인), 종친과 문무관의 아내로서 봉작을 받은 여인들이다. 왕실은 공주, 옹주, 부부인, 군부인이 있고 대신의 부인은 정경부인(貞敬夫人), 정부인(貞夫人), 숙인(淑人), 공인(恭人), 영인(令人), 단인(端人), 유인(孺人)이다. 임금의 유모인 봉보부인은 주로 궁궐에서 생활했으나 외명부로서 종 1품이다. 

 

왕비의 주요행사에는 친잠례가 있다. 누에를 치고 고치를 거두는 양잠을 체험하고 그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의식이다. 내·외명부도 참석을 해야 한다. 궁궐의 후원에서 열렸다. 이 때 왕비는 다섯 가지, 내·외명부 1품은 일곱 가지, 2,3품은 아홉 가지의 뽕잎을 땄다. 임금의 농사체험은 친경례라고 하는데 몸소 쟁기를 다섯 번 미는 오퇴례(五推禮)를 했다.  


 궁궐에서 나가는 궁녀는 어떻게 생활을 했을까? 사관이 그녀들의 삶을 추적하지 않았고 그녀들도 자신들의 기록을 남기지 않아서 기본적으로는 알 수 없다. 그녀들이 조선왕조실록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대신이나 종친들과의 간통사건이 대부분이다. 한 번 궁궐로 들어온 궁녀는 근무 날짜나 임금의 승은과 상관없이 임금의 여인으로 간주돼서 임금 외는 누구나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불경죄였다. 다만 임금이 궁녀를 하사한 경우는 결혼이나 후처로 삼을 수 있었다. 

 

궁궐을 나간 궁녀와 간통한 남자는 공신이거나 종친 등이 많았다. 사헌부 등에서 불경죄의  처벌을 상주했으나 임금은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다. 공신을 처벌 할 수 없다는 논리와 종친은 법에 규정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태조의 개국공신 조영무도 궁녀 관음을 후처로 삼는다.  부역을 피하는 관노비를 추적하면서 이들의 개인적인 관계가 발각이 되었다. 조영무는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다며 자신의 직책 파직을 요청했으나 태종은 죄를 묻지 않는다. 성종 대에 강양군 이축도 놓아 보낸  궁녀를 간통해서 첩으로 삼는다. 사헌부에서 죄를 추궁하겠다고 했으나 성종은 법률에 근거가 없다고 해서 버틴다. 경국대전에 ‘놓아 보낸 궁녀를 첩으로 삼은 조관(朝官)은 죄를 준다’라고 돼 있기 때문이다. 조관은 조정의 신하다. 결국 조관 앞에 ‘종친 및(宗親及)’ 세 글자를 더해서 이 조항을 고친다. 이후 간통한 종친을 처벌하기도 했다. 

 

 궁궐 내의 궁녀들이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여인네들의 질투와 관련이 많았다. 주로 후궁들이 임금의 사랑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 현재 임금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여인을 임금과 멀어지게 하는 저주사건이다. 저주의 방법은 사람이나 동물의 뼈를 땅에 묻거나 인형 등을 바늘로 찌르는 것이다. 그 효과는 알 수 없지만 행동대원으로 궁녀들이 동원되었다. 궁녀들은 이러한 저주사건에 휘말려서 자신이 모시는 주인의 처지에 따라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궁녀는 사랑의 조언자 역할도 했다. 세종은 우리에게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성군이지만 개인적인 불행이 있었다. 이 중에서 특히 며느리 복은 없었다. 세종의 첫 아들 세자 문종은 만 13세에 첫 결혼을 한다. 휘빈 김 씨로 상호군 김오문의 딸이었다. 대대로 명문 집안이었다. 휘빈 김 씨는 결혼 1년 후 남자에게 사랑 받는 법을 시녀 호초에게 가르쳐 달라고 한다. 호초는 처음에는 모른다고 했으나 휘빈 김 씨의 강요에 못 이겨서 궁녀들 사이에 떠도는 두 가지 방법을 가르쳐 준다.  


“남자가 좋아하는 여인의 신발을 불에 태워서 그 가루를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나는 사랑을 받고 상대편 여자는 멀어 진다.”

 “두 뱀의 교접으로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으면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

김 씨의 이러한 주술이나 주문을 외우는 압승술은 세종에게 발각된다. 세종은 부덕한 세자빈은 조종의 제사를 받들 수 없고 집안의 법을 더럽힌다고 해서 김 씨를 서인으로 삼고 궁궐에서 폐출시킨다. 시녀 호초는 세자빈에게 압승술을 가르쳐줬다는 이유로 참형에 처해진다.


 궁녀는 또한 원하지 않는 애인이 되어야 했다. 세자 문종은 두 번째 세자빈 봉 씨를 맞이한다. 김 씨가 폐출된 3개월 후다. 그러나 뜻밖에도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직접 맞이하는 친영례 이후로 둘 사이의 금실이 좋지 않았다. 세종과 왕비가 세자를 타일러 사이가 조금 좋아졌지만 침실의 일까지는 가르칠 수 없었다. 

세종은 후사를 염려해서 세자에게 세 명의 후궁을 붙여준다. 후일 단종의 어머니가 되는 권 씨로부터 임신이 있었다. 그러자 봉 씨도 ‘임신을 했다’ ‘낙태를 했다’ 등의 거짓말과 함께 비뚤어진 행동을 한다. 여종에게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고 여종 소쌍에게 동침을 요구했다. 소쌍은 봉 씨의 강요에 못 이겨서 옷을 반 쯤 벗었으나 봉 씨가 나머지 옷을 강제로 다 빼앗고 남자와 교합하는 희롱을 했다. 여러 번 있었고 궁녀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다.

 세종은 이보다 앞서 시녀와 여종 사이의 동침을 우려해서 이를 금하는 법령을 세웠다. 곤장 70대다. 이후 백 대를 더 칠 수 있었다. 자신의 세자빈이 그럴 줄이야. 세종은 봉 씨도 폐출시킨다. 소쌍에 대한 처리 기록은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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