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기사수정


오드리 햅번은 세계 최고의 스타로서 자신이 평생 동안 쌓아 올린 명성과 인기를 아낌없이 불우한 어린이 구호를 위한 기금 모금활동에 사용했다. 그는 받은 사랑에 보답할 줄 아는 진짜 위대한 스타다.


"매혹적인 입술을 가지고 싶다면/친절한 말을 하라/사랑스러운 눈을 가지고 싶다면/사람들의 선한 점을 보아라/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싶다면/그대의 음식을 배고픈 자와 나누어라/예쁜 머릿결을 가지고 싶다면/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그 손가락으로/ 그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게 하라/아름다운 자세를 가지고 싶다면/결코 그대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님을 알도록 하라."  햅번이 좋아한 시인 샘 레벤슨의 ‘시간이 알려주는 아름다움의 비결(time tested beauty tips)’이란 시로 그가 죽기 전 크리스마스에 자녀들에게 유언으로 들려 준 시다. 


오드리 햅번(Audrey Hepbum)은 1929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파시즘의 신봉자였다. 햅번이 6살 때 아버지는 나치에 가담하여 가출을 했으며 어머니는 파시즘에서 빠져 나와 햅번을 키웠다. 2차 세계대전 중 가난 속에서 굶어 죽을 처지에 있을 때 유니세프의 전신인 국제 구호기금이 그녀를 구해 줬다. 햅번은 어릴 때 발레를 좋아했지만 170cm 큰 키가 발레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1951년 처음으로 '라벤더 힐몹'에 출연하면서 배우의 삶을 시작했으며 1953년 로마의 로케이션 촬영으로 만든 윌리엄 라일리의 '로마의 휴일'에 공주 역으로 사진기자역의 그레고리 팩과 함께 출연하여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세계무대에 등장 했다. 24살의 나이에 아카데미 여주연상을 받았다. 1954년에는 '운다네'로 토니상 여주연상까지 받았다. 


그는 1953년부터 1967년까지 15개의 작품에 출연했다. 성공적인 대표 작품은 1954년 '사브리나' 1959년 '파계' 1961년 '아이의 시간' '티파니에서 아침을' 1964년 '마이 페어 레이디' 등이다. 오드리 햅번은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소피아 로렌이 여배우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절에 호리호리하고 지적이고 고전적인 모습으로 헐리우드에 혜성처럼 나타났다. 

그에게 당대의 최고 미인, 영원한 미의 상징, 세기의 미녀 등의 찬사를 보냈다. 


2006년 햅번이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출연하면서 입었던 그의 작은 드레스가 런던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41만 파운드로 영화에서 입었던 드레스로는 최고 가격에 팔렸다. 그 드레스의 판매액은 인도의 가난한 이들을 돕는 자선단체인 시티 오브 조이 에이드에 보내졌다.  


1954년 로마의 휴일로 스타덤에 오른 지 1년 만에 영화배우 멜 퍼러와 첫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이 때 그는 25세였으며 남편은 12살이나 많았다. 배우이면서 제작자와 감독이었던 퍼러는 바람둥이었다. 결혼 14년 만에 이혼하고 말았다.


두 번째 결혼은 의사인 안드레이 토니였으며 9살 연하의 남자였다. 배우보다 평범한 주부가 되려고 했으나 남편의 외도를 막을 수 없어 1979년 이혼하고 말았다. 두 사람의 남편에게서 2명의 아들을 각각 낳았다. 

그 후 만난 로버트 월더스는 결혼은 하지 않고 햅번의 구호활동을 도왔으며 죽는 날까지 함께 했다. 

1988년 마카오의 음악 콘서트에 초대 되면서 유니세프에 자원해 참가해서 유니세프 친선대사 임명을 받았다. 60세의 햅번은 유니세프가 원하는 곳이면 오지나 전장이나 전염병 지역에도  찾아갔다. 그가 구호활동을 위해 찾아간 곳은 수단, 이디오피아, 방골라데시, 엘살바도르 등 50여 곳이었다.


 1992년 소말리아를 방문했을 때 죽은 어린이들이 쇼핑백만한 자루에 담겨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이다 어린이 200만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다"고 외쳤다. 그는 기꺼이 어린 아이를 보듬어 안았고 아픈 어린이의 눈썹 위로 기어가는 파리를 내쫓았으며 전염병 위험지역을 거리낌 없이 방문했다. 

그의 헌신과 노력은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왕년 스타의 구제 활동에 감동해 새로운 기부 운동이 확산되었다. 


은막의 스타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햅번은 그 사랑에 보답을 할 줄 아는 진짜 스타였다. 1992년 소말리아를 방문한 후 11월 로스앤젤레스의 병원에서 직장암 진단을 받았다. 고향 스위스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지내다가 1993년 1월 63세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햅번의 아들은 한국을 찾아와 팽목항 근처에  세월호 기억의 숲을 조성해 주었다. 유니세프와 민간단체가 '오드리 햅번 평화상'을 제정해 그 뜻을 계승하고 있다. 그의 무덤에는 지금도 계속 찾아오는 사람들이 매일 새로운 꽃을 올려놓는다고 한다.




<저작권자 이슈게이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issuegate.com/news/view.php?idx=5527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Warning: include_once(../news/side_banner_menu.php): failed to open stream: No such file or directory in /home/issuegate.com/www/skin/news/basic/view.skin.php on line 394 Warning: include_once(): Failed opening '../news/side_banner_menu.php' for inclusion (include_path='.:/usr/share/pear:/usr/share/php') in /home/issuegate.com/www/skin/news/basic/view.skin.php on line 39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