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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28) 산실청을 설치하다 - 왕비의 공간 교태전(交泰殿) ②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7-07 06:06:42
  • 기사수정 2019-07-15 14: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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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조선은 왕조국가다. 왕조국가는 임금의 씨가 후사(後嗣)가 된다. 後는 뒤 嗣는 잇다 계승하다의 뜻으로 후사(後嗣)는 대를 잇는 자식 즉 세자를 일컫는 말이다. 왕조국가에서 후사를 탄생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교태전(交泰殿)을 음양의 조화와 연결시켜서 훌륭한 세자가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조선의 태조에서 고종까지 27 명의 왕에서 태어난 자식은 260 명이다(조선왕조 국왕 재위표, 우정문고). 왕비와 후궁에서 태어난 자식을 다 포함한 것으로 선원계보도의 숫자와는 차이가 난다. 선원계보도에는 태어나서 바로 죽은 자식을 올리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아기를 해산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태어난 아이뿐만 아니라 산모도 바로 죽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왕실에서도 해당되었다. 문종의 첫 부인 현덕왕후 권 씨는 세자빈 시절 단종을 낳고 바로 이튿날 돌아갔다. 예종의 첫 부인 장순왕후 한 씨도 세자빈 시절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초기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왕손의 탄생과 산모를 보살핀 산후 관리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어째서 일까?


 세종대왕은 왕비 소헌왕후 심 씨와 8남 2녀를 두었다. 이 중에서 세종이 임금이 된 후 낳은 자식은 안평대군을 비롯해서 6명의 왕자이다. 그 6명의 왕자들이 모두 탄생했다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왕자 이용(안평대군)이 출생하니 의정부와 육조가 하례하였다.” (1418년)

“왕자 이구(임영대군)가 출생하다.”(1420년)

“왕자 이유(금성대군)가 출생하다.”(1426년) 

 왕비가 어느 시점에서 임신을 알고 산실(産室)을 준비 했는지? 궁궐 어디에서 탄생했는지? 에 대한 정보는 없고 단순히 탄생했다는 사실만 기록돼 있다. 6명 왕자 탄생의 약 3개월 전부터 조선왕조실록을 모두 조사했으나 왕비의 임신이나 왕자의 탄생에 관한 특이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세종은 여성의 출산에 대해서 세심하게 배려를 한 왕이다. 세종은 관노비의 출산 휴가를 산달을 포함해서 100일을 주었다. 이것도 모자라서 그 남편까지도 30일 휴가를 주어서 산모와 아기를 간호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서 왕비의 출산과 궁궐이나 관청에서 잡일을 해야 하는 관노비의 출산과는 물론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관노비의 출산 휴가까지 꼼꼼하게 챙긴 세종을 비롯한 조선 초기의 다른 왕들도 왕비나 후궁의 출산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내린 기록이 없었다. 의외였다. 조선은 왕조국가였음으로 궁궐에는 당연히 산실청(産室廳)을 설치해서 왕손의 탄생과 산모의 건강을 확인하고 보호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왕손의 탄생에 약간의 변화를 보인 것은 성종 대부터다. 조선 시대 궁궐에서 첫 탄생한 원자(元子)는 연산군이었다. 연산군 이전의 왕들은 아버지가 고려 장군이거나 조선의 태자로 있을 때 태어났다. 

제9대 성종의 첫 부인 공혜왕후 한 씨는 병으로 요절한다. 후사는 없었다. 성종은 후궁인 윤 씨를 총애해서 공혜왕후 사후에 왕비에 오르게 한다. 나중에 폐비 윤 씨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 사이에서 성종의 적장자로 태어난 것이 연산군이고 그 장소는 창덕궁이었다.  

 

도승지 현석규 등이 창덕궁 선정문에 나아가서 “조선의 개국 이후 오늘처럼 경사스러운 날은 없습니다” 라고 축하를 올렸고 성종도 “정비 윤 씨가 원자를 탄생해서 국본을 튼튼히 하였다”고 기쁨을 나누면서 사면령을 내리고 세금의 일부도 면제해 주었다. 임금의 말씀을 전하는 내시와 내의원에게 한 직급을 올려주었다. 원자의 출산에 내의원이 등장하고 포상을 한 첫 기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적장자를 낳은 산모를 보살핀 흔적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산실청이 등장하는 것은 1603년 선조 대이다. 임진왜란 이후다. 선조는 묘향산 사고에 사관을 파견해서 산실(産室)에 대한 전례와 상을 주는 규정을 베껴오라고 한다. 묘향산 사고는 임진왜란 중 강화도에 있는 조선왕조실록을 묘향산의 보현사 별전으로 옮긴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관리하는 예문관 소속 김대덕이 현지에 갔으나 참고할 내용이 거의 없었다. 내의원은 산실에 관한 자신들의 일상적인 업무를 사서(史書)에 싣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이 없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내의원은 별도의 규정을 만들 필요 없이 ‘중전산실청’으로 이름을 짓고 내의원 4명과 야간에 필요한 약재를 구할 경우를 대비해서 제조(책임자)도 숙직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선조는 전례대로 의관 3명만 숙직을 하고 제조는 숙직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선조 대에 설치한 중전산실청은 조정의 논의를 거친 것이 아니라 내의원과 의논한 것이다. 산실청은 숙직하지 않는 제조와 숙직하는 의관 3명으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의 조선왕조실록에도 산실청을 설치한 기록은 있으나 그 운영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미미하다.  


 

조선의 산실청을 엿볼 수 있는 것은 개인의 기록이다. 고종 대에 <임하필기(사진·네이버이미지)>를 저술한 이유원이 기록을 남겼다. 이유원은 판중추부사로서 고종 8년 산실청의 책임자가 된다. 명성왕후 민 씨의 첫 임신이었다. 

 

산실청은 책임자 본인을 포함해서 약방(내의원) 3명과 대령의관, 별장무관, 범철관 그리고 판중추부의 아전으로 구성됐다. 범철관은 산실청이나 신주(神主)에 쓰이는 나무의 방향이 좋은지 나쁜지 판별하는 관리다. 산실은 교태전이었다. 이후 약방은 매일 중궁전에 문안을 한다. 

산실에는 24방위도를 해당 방위에 붙이고 주홍색의 당월도(當月圖)와 차지부를 붙인다. 차지부는 편안한 출산을 위해서 땅을 빌리는 주문으로 3번 외운다. 먼저 길방(吉方)으로 볏짚을 깐다. 그 위에 짚자리, 백교석, 양털깔개, 두꺼운 기름종이, 다람쥐 가죽, 삼실, 흰 말가죽을 덮고 마지막으로 가느다란 짚자리를 깐다. 조금 가까이 위에 태의(胎衣)가 놓일 방위에는 붉은 글씨의 부적을 붙인다. 임산부가 잡을 수 있는 말고삐를 방의 벽에 건다. 위급할 때 내의원을 부르기 위해서 마루에 구리방울을 달아 둔다. 이러한 의식 절차를 모두 기록해야 한다. 


조선의 왕비가 출산에 대비해서 어떠한 준비를 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현재까지 이것이 유일한 자료이다. 또한 아기가 탄생한 이후 올리는 권초례를 주관하는 권초관을 뽑는다. 권초관은 보통 덕이 있고 남아를 많이 둔 사람이 된다. 권초는 해산할 때 깔았던 짚자리를 거두는 의미다.


 산실청 설치 이후 약 한 달 만에 고종의 첫 아들 원자가 탄생했다. 그러나 원자는 그동안의 모든 노력을 헛수고로 돌린다. 원자가 태어난 후 4일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후궁은 잉태했을 때 온갖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태종은 원경왕후 민 씨의 계집종(효빈 김씨)을 임신시켰다. 김 씨가 아침에 배가 태동해서 진통을 시작하자 원경왕후는 그녀를 문 바깥에 두었다. 건강한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12월의 추운 겨울이었다. 사내 종 화상이 이를 불쌍히 여겨서 서까래를 두 개 걸쳐서 거적으로 덮어주었다. 그 날 애기를 낳았고 바람과 추위의 핍박 속에 모자가 살아난 것은 천운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날 태어난 아이가 경녕군 이비(李裶)로 후일 중국의 외교사절로 가서 황제의 총애를 받고 세종대왕도 무척 아끼는 인물이었다.


후궁의 해산에서 제대로 대우를 받은 것은 숙종 대였다. 숙종은 후궁이 해산 할 때 친정에서 교자를 타고 궁궐에 들어오게 하는 ‘선소동패(宣召銅牌)’의 출입증을 발급해 주었다. 후궁은 친정의 간호아래 실내에서 편안하게 출산을 할 수 있었다. 



 경복궁 교태전을 뒤 돌아가면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교태전 후원으로 아미산이라고 한다. 아미산은 미인의 아름다운 눈썹처럼 산세가 수려한 중국의 사천성에 있는 산의 이름과 같다. 4개의 층계로 이루어져 있다. 화강석 기단의 맨 위는 4개의 붉은 아름다운 굴뚝이 있고, 거기에는 당초무늬, 십장생, 학 등을 그려서 건강, 복, 장수 등을 기원하고 있다.

 나무를 배경으로 꽃은 계절에 따라 피고 돌에는 함월지(涵月池)와 낙하담(落霞潭)의 글자를 새겨서 달을 머금은 연못과 노을이 지는 못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아미산은 좁은 공간이지만 외출을 자주 할 수 없는 중전을 위해서 교태전 뒷마당으로 자연을 끌어온 것이다. 

 

그 옆에 건순각(健順閣)이 있다. 건순은 건강한 순산의 줄임말(?)로 연상될 수 있어서 산실청으로 해석을 하기도 한다. 건순(健順)은 <중용장구> 제1장의 주석에 나오는 말로 음양을 의미한다. 건순은 산실의 의미와 다른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임진왜란 이전까지 경복궁에 산실청을 설치한 기록이 없고, 또한 고종 대에 설치한 산실청은 교태전이었다. 그래서 건순각을 산실청으로 설명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필자는 건순각 내부를 본 적도 없어서 건순각의 용도를 모른다. 그러나 굳이 건순각의 용도를 설명하자면 건순=음양의 의미에 맞게 산실보다는 합방(合房)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 보다 더 연구가 필요하다. 


교태전은 왕비의 품위에 어울리게 아름다운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들어가는 입구의 문도 둘로 나누어서 여성이 쉽게 열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 교태전은 왕비의 공간으로서 산실청이 설치되기도 했고 세조대에는 신하들과의 소통장소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태전을 비롯한 왕비의 생활에 풀어야 할 의문도 많다. 왕비에 대한 기록이 세상에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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