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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20) 세조의 술과 정치 - 경복궁 정치 1번지 사정전 ②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5-04 20:34:48
  • 기사수정 2019-05-04 20:5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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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자동차는 인간의 이동을 편리하게 하지만 또한 생명을 위협하기도 한다. 사물의 물성에는 양면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그 기기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문명의 이기가 되기도 하고 흉기가 되기도 한다. 인간에게 술도 이와 같지 않나 생각한다. 술은 사람끼리 소통하는 좋은 매개체이다. 어색한 분위기를 바꿀 수도 있고 평소에 하고 싶은 말을 솔직히 드러내기도 한다. 반면 술이 지나쳐서 일어나는 낭패나 폐단도 너무나 많다. 

 조선의 왕도 인간이다. 술을 좋아하는 임금이 있었고 금주령을 자주 내린 왕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술자리’를 검색하면 1208건이 나온다. 이 중에서 14년간 재위한 세조대에 577건이다.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이다. 반면 ‘금주(禁酒)’를 검색하면 222건이 나오는데 세조대에는 단 2건이다. 세조가 신하들과 얼마나 자주 술자리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세조와 신하가 나눈 술자리의 대화, 용서에서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한 그 기록을 따라 가본다.


 세조가 즉위한 5개월 후 사정전에서 주요 신하들과 국정을 논하고서 술자리를 갖는다. 사헌부 집의 이예가 술에 취해서 어탑((御榻)위에 올라가 “이유(李瑜)를 강력히 처벌하라”고 세조에게 요구한다. 조선시대 사헌부는 나라의 기강과 풍속을 바로잡고 관리들을 규찰하고 탄핵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집의는 종3품으로 사헌부의 핵심관료이다. 이유는 세조의 5번째 동생으로서 반역혐의가 있었다. 이예가 정상적인 절차로서 이유의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 그의 업무 권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술에 취해서 어탑까지 올라간 것이다. 어탑은 임금이 앉는 자리를 높이는 시설물이다. 요즘에 관리가 술에 취해서 대통령 가까이로 가서 소리를 지른다면 아무리 민주국가라도 경호원의 제지를 받고 그 까닭을 조사 받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얼굴인 용안을 똑바로 볼 수도 없었다. 영조가 신하들과 경연(공부)을 할 때 어사로 잘 알려진 박문수가 목소리를 높이고 임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고 우의정 김흥경이 죄를 물어야 한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있다.

 이예가 다음날 술주정을 사죄하려 임금에게 갔다. “신이 어저께 술에 취해서 예의를 잃었으니 벌을 주소서.” 세조의 대답은 의외였다. “고마워하지도 말고 신경 쓰지 마라”고 하면서 모피로 된 방한구를 내린다. 11월 달이었다. 


사정전 내부 모습. 사진=네이버 이미지

 

이와 비슷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세조가 사정전에서 국정을 논하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이석산 살인사건’으로 세조와 신하들 간 범인에 대해서 논박이 벌여졌다. 세조는 범인을 애써 외면하려고 했다. 신하들이 주장하는 범인은 원종공신이었기 때문이다. 사간원 좌헌납 구종직도 다른 대신들과 생각이 같았다. 그런데 세조는 구종직의 주장에 답변을 하지 않고 동석한 세자에게 느닷없이 “너는 구종직의 사람됨을 아느냐? 참으로 어진 선비이니라”라면서 분위기를 확 바꾸어 버린다. 세조는 더 이상 구종직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한 구종직은 술주정으로 계속 지루하게 말을 이어갔다. 임금의 인내가 한계에 온 것 같다. 구종직을 밖으로 끌어내게 하고 남은 사람끼리 술을 더 마시고 춤까지 췄다. 

구종직도 이예처럼 다음날 술주정을 사죄하러 갔다. “소신이 어제 술에 취하여 예의를 어겼으니 벌을 주소서.” 세조는 구종직의 죄를 묻기는커녕 나이가 많음을 불쌍히 여긴다고 하면서 관작을 한 등급 더 올려주고 맡은 직무에 충실하라고 한다. 구종직은 죄를 빌러 갔다가 복덩이를 하나 더 받아 온 셈이다.

 

세조가 집권하는데 최고의 공신은 한명회다. 세조가 스스로 나의 장자방이라고 했을 정도이다. 장자방은 한나라 유방을 도운 공신으로 ‘최고의 책사’로 불리는 대명사로 사용하기도 한다. 세조는 역시 사정전에서 종친 및 주요 중신들과 술자리를 한다. 이 때 세조는 중전과 함께 술잔을 받치는 그릇을 잡고 한명회에게 술을 내린다. 왕과 왕비가 동시에 술잔을 잡고 술을 내리는 매우 이례적 행위였다. 다음 날 주요 대신들에게 한명회에게 술을 내린 것을 자랑한다. “한명회는 다른 공신에 비할 바가 아니므로 중전과 함께 술을 내렸다.”

 세조는 형식적으로는 조카인 단종에게 선위로 왕위를 물려받았다. 정상적인 절차를 거친 것이다. 그러나 그 내면을 보면 왕위를 찬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조가 신하들과 술자리를 자주해서 소통을 한 것은 이런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일지도 모른다. 


 세조가 신하들과 나누는 술자리의 분위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묘하게 바뀌어 간다. 세조 3년 자신이 술에 취하기도 했다. 술자리는 역시 사정전으로 국정을 논한 이후였다. 영의정 정인지, 대사헌 김순, 병조참판 구치관 등이 참석했다. 세조는 “오늘 술을 마시는 것은 술을 달게 여기어서 즐겨 마시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정인지에게 말했다. 정인지는 술자리의 참석자들은 공신임으로 즐겨 마실 수 있다고 맞장구를 쳤다. 세조가 다시 질문을 한다. “한나라 고조 유방이 한신과 팽월을 어떻게 대우했는가?” 한신과 팽월은 유방을 도운 공신이지만 후에 둘 다 유방에게 죽임을 당한다. 세조는 그 내용을 알고 질문을 한 것이다. 즉 공신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내포한 것이다. 정인지는 “어찌 시비를 논하겠습니까?”라고 비켜갔다. 정인지도 이날 부축해서 나갈 정도로 술을 마셨다.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하는 유교국가다. 고려의 불교 폐해를 답습하지 않도록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조선의 태조, 세종 등 초기의 왕들은 개인적으로 불교를 포기하지 않았다. 스님을 스승으로 모셨고 궁궐 안에 내불당도 지었다. 

 세조도 불교에 대해서는 선왕들과 비슷한 생각이었다. 세조 4년 역시 사정전에서 세자, 종친, 공신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고 술이 오고 갔다. 영의정 정인지는 세조가 주자소를 통해서 <법화경> <대장경> <월인석보> 등 불경을 간행한 것이 옳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세조는 화를 냈고 술자리를 파했다. 술자리에서 너그러운 분위기를 조성해 줬던 초기의 세조 모습은 아니었다. 그 앙금은 다음 날로 이어졌다. 

 세조는 다음날 후원에서 활쏘기를 구경했다. 종친, 주요 대신, 정인지도 참석했다. “어제 취중에 나를 욕보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정인지에게 물었다. 정인지는 “취중의 일이라 기억하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했으나 세조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지금은 술에 취하지 않았으니 부처의 도리와 유학의 도리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정인지는 술이 너무 취했다고 다시 얼버무렸다. 세조는 이날 결국 정인지의 고신(告身)을 거둔다. 고신은 조선시대의 관리 임명장으로서 고신을 거두는 것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정인지가 영의정에서 쫓겨난 것이다. 신하가 술자리에서 정책을 이야기 했으나 그 말의 처리는 차츰 달라지고 있었다. 세조의 태도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정국 운영에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인지는 이후 의금부에서 국문을 당하고 불경인 <능엄경>을 칭찬하고 반면 유학서인 <중용>을 비판한다. 그럼에도 좌의정, 우찬성, 예조판서 등의 핵심 관료뿐만 아니라 사헌부, 사간원등에서도 임금에게 공손하지 못한 죄를 물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세조는 정인지가 스스로 잘난 체 했으나 다른 뜻이 없고 부처님도 좋아하고 공신임으로 용서한다고 하면서 5일 후 복귀시킨다. 이제 술자리에서 직언을 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세조에게 성삼문의 단종복위운동을 밀고한 정창손도 술자리의 대화가 문제가 됐다. 그도 영의정이었다. 세자의 학문을 논하면서 “(세자가)학문에 통달한 뒤에 국사를 돌려주려고 한다”는 세조의 말에 “진실로 마땅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이 문제였다. 일반적인 수준의 답변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왕의 자리를 세자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저의가 있다는 해석도 가능했다. 정창손은 자신의 심경을 상소했으나 임금은 가타부타였다. 그는 6개월 간 귀양살이를 가야 했다. 말은 더욱더 가려야 했다.


세조 어진(초본에 색을 입힌 것임). 사진=네이버이미지

 

평안도 절제사 양정이 사정전에서 세조를 뵈었다. 세조는 양정이 오랫동안 변방에 근무했다고 해서 그를 위로하는 술자리를 베풀었다. 양정은 “전하가 12년간이나 오랫동안 임금을 하셨으니 이제 편안하게 지내셔야 합니다”라고 운을 뗐다. 세조는 “경이 지역 근무를 오래했으니 그 지역의 인심도 그러하던가?”라고 물었고 양정은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세조는 “내가 어찌 임금의 자리를 탐내는 사람인가?”라고 하면서 세자에게 양위하려고 도승지에게 대보(大寶)를 가지고 오라고 명한다. 신숙주, 한명회 등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종묘와 사직을 어찌하겠습니까?”라고 말렸다. 도승지 신면 등은 대보가 보관되어 있는 상서원에 갔으나 차라리 임금의 명을 어기는 죄를 받을 각오로 대보를 붙들고 움직이지 않는다. 양정은 임금의 속내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승지 등은 어째서 대보를 가져오지 않는가?”

 세조는 다음날 공신으로서 임금의 은혜와 사랑을 믿고 자신의 힘을 과시해서 죽음을 당한 한신, 팽월의 예를 들었다. 앞서 정인지에게 물었던 질문이었다. 양정도 계유정난을 도운 공신이다. 세조는 여러 신하들도 들었으니 용납할 수 없다고 하면서 “양정은 패악한 역도” 로 규정짓는다. 그리고 3일 후 참수시킨다. 그의 동생 세 명도 파직되고 아들 3명은 관노비가 된다. 상서원에서 대보를 붙들고 가져 오지 않은 도승지 신면에게 세조는 “그대는 신숙주의 아들이니 진실 된 인물이다”라고 했다.


 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인 역린을 건드리면 죽음을 당한다. 세조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나 왕의 자리에서 피를 봐야했고 상왕인 조카까지 죽여야 했다. 세조에게는 왕의 자리 그 자체가 역린이었을지도 모른다. 술자리를 통해서 신하들과 자주 소통을 했으나 끝내는 공신의 생명을 빼앗은 것이다. 세조는 2년 후 타계하면서 왕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세자에게 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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