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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13)경복궁 최고의 미인 경회루 ③박자청, 내시에서 장관까지 -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3-16 20:09:35
  • 기사수정 2019-03-20 11:3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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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박자청은 태종12년 경회루를 짓는다. 당시 그의 직책은 공조판서다. 오늘날의 건설부장관에 해당된다. 조선시대에 판서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과거에 급제를 하거나 고위직 부모를 두어서 관직에 오르는 음서를 통해서다. 그러나 박자청은 과거 시험에 응시한 적도 없고 고위직 부모를 둔 것도 아니다. 심지어 학문도 없었다. 남의 집에서 자란 미미한 신분이었다. 그는 판서까지 오를 수 있는 어떠한 객관적인 조건도 갖추지 못했다. 조선의 판서가 되어 경회루를 건설한 박자청의 행적을 따라가 본다.

 조선왕조실록에 ‘졸기(卒記)’를 치면 2116건이 나온다. 졸기는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 생전의 이력이나 활동 등을 사관이 기록하는 평가서다. 조선왕조실록에 졸기가 남겨져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고위직으로서 활동과 업적을 이룬 관리다.  

 박자청의 졸기도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그의 졸기를 보자.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 박자청이 졸하였다. 그는 황희석 집의 사람이자 내시 출신으로서 낭장이 되었다”로 시작한다. 이 기록으로 보면 그는 숨지기 전에 삼군(三軍)의 우군지휘부였고, 내시 출신으로 낭장(6품)이 되었고 황희석의 집에서 자란 것을 알 수 있다. 부모에 대한 기록은 없다.


대성전(문묘의 정전) 

 

조선에서 내시로 출발해서 무과 시험을 거치지 않고 군의 지휘부까지 오른 예는 박자청 외에는 없을 것이다. 그 연관성도 상상이 안 된다. 이 연결 고리로 황희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황희석은 영해군 출신의 고려 군인으로 배극렴 등이 태조를 왕으로 추대할 때 현장에 없었다. 당시 그는 부모상 중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개국2등 공신에 오른다. 황희석은 이성계의 휘하 병사였다. 태조가 고려 장군으로 말에서 떨어져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때 황희석이 병사들을 동원해서 구해준다. 태조는 그 공을 잊지 않고서 황희석을 개국공신으로 추천하고 무장으로 등용한다. 황희석은 궁궐 수비 업무인 지중추원사까지 오른다. 

박자청이 낭장에 오른 것은 황희석의 추천에 의한 것으로 추측된다. 낭장은 군인이다. 박자청이 태조의 눈에 띄어 발탁이 되는 것도 군인으로 궁궐 수비 업무 때다.   

 태조 2년 박자청은 오늘날 청와대 경호실에 해당하는 입직 군사로서 궁궐 수비를 맡고 있었다. 이 때 태조의 배 다른 동생 의안대군 이화가 궁궐에 들어가고자 했다. 박자청이 제지를 했다. 왕의 소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화는 태조를 도운 개국 공신이고 신임도 높았다. 이화는 자신의 위세를 과시해서 박자청의 얼굴을 발로 차고 상처를 입혔다. 그럼에도 박자청은 끝까지 자신의 업무를 수행해서 들여보내지 않는다. 

 이 사실이 태조의 귀에 들어갔다. 태조는 갑질을 한 동생을 불러 야단을 쳤다. “명령에 따라서 궁궐 수비를 엄격히 한 군인은 진실로 옳고 너는 잘못했다.”

 원칙적인 이 행동이 박자청에게 기회가 된다. 태조는 박자청을 바로 호군으로 임명하고 은대(銀帶)를 하사하면서 내상직(內上直)으로 자리를 옮기게 한다. 내상직은 왕의 최측근에서 경호하는 업무다. 졸기를 다시 보자. “그는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잠도 자지 않고 순찰을 돌아서 태조의 신임을 받았다.” 

 박자청은 태조에 이어 태종의 신임도 높았다. 그는 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내지만 건설 업무에서 더 많은 업적을 남긴다. 

 태종은 한양으로 환도하면서 창덕궁 건설 감독을 이직, 박자청, 신극례 등에게 맡긴다. 이후 박자청은 창덕궁의 누각과 침실을 짓고 돌다리도 놓는다. 돌다리는 금천교(錦川橋)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과 진선문 사이에 있다. 금천교는 조선시대 당시 지은 궁궐 건조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 보물 제 1762호로 지정돼 있다. 올해 608 살이 된다. 금천교는 현존하는 서울의 다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두산백과)

 그는 태종 대에 문묘도 다시 짓는다. 문묘는 태조 대에 지었으나 정종 대에 대성전이 불탄다. 박자청은 문묘를 건설할 때 밤낮으로 감독을 했다. 4개월 만에 96칸을 지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새로 지은 문묘가 높고 깊고 단정해서 옛 것보다 더욱더 훌륭하다”고 기록돼 있다.

 이 외에도 태조의 정부인 신의왕후 한 씨의 무덤인 제릉의 난간석, 원찰인 개경사와 연경사, 흥천사 수리, 모화루의 연못, 태조의 무덤 건원릉, 군량미 등 군수물자를 관리하는 군자감, 경복궁 수리 등 조선초기의 건설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건축물뿐만 아니라 나무 심는 데도 감독을 한다. 태종11년 남산에 소나무를 심게 한다. 여기에도 박자청의 감독으로 군인과 백성 4천 명 이상이 동원돼 20일 동안 역사를 한다. 애국가의 ‘남산 위에 저 소나무~’는 이처럼 역사 속으로 들어가면 박자청과 조선 백성의 손길로 이어진다.

 태종 13년 좌정승 하윤 등이 숭례문에서 용산강까지 운하를 파자고 건의한다. 박자청이 “만 명을 동원해서 한 달 이내에 끝내겠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태종은 백성의 어려움을 고려해서 실행하지는 않았다. 

 박자청은 오늘 날 우리에게 좋은 선물을 남겼다. 세종 2년 살곶이내(箭串川)에 다리 놓은 일을 감독 한 것이다. 태종은 상왕으로 물려난 후 동쪽으로 행차를 하면서 살곶이내 건너편에 가마솥을 엎어 놓은 것 같은 절경의 언덕을 발견하고 바람과 비를 피하는 이궁(離宮)과 정자를 짓는다. 정자는 낙천정이다. 이름은 좌의정 박은이 지었다. 태종은 매사냥을 구경하려 낙천정으로 자주 행차했다. 이곳은 나라의 목장도 있었으며 군사훈련장이기도 했다. 때로는 물이 불어서 배로 건너야 했다. 이 불편을 줄이기 위해서 태종의 명으로 다리를 놓은 것이다. 살곶이 다리는 그 후 성종 대에 본격적으로 건설된다.


살곶이 다리(서울 성동구)


 그러나 박자청의 뛰어난 공사 업적 이면에는 사헌부의 탄핵도 같이 따라 다녔다. 그는 ‘빨리빨리’의 원조 격이다. 사헌부의 상소다. “(박자청은) 모든 일에 있어서 백성의 폐해를 돌보지 않고 오직 빨리 하기만 힘쓰는데 건물을 짓거나 수리할 때는 더욱 심합니다.” 

그는 공사현장에서 채찍을 사용했다. 공사를 서두른 나머지 백성이 죽기도 했다. 백성의 어려움을 보고해야 하는 사헌부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백성의 죽음에는 얼굴빛이 변하지만 박자청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박자청은 배우지 못하였으나 다만 부지런하고 곧기만 하다. 나의 명으로 창덕궁, 성균관, 모화루와 경회루 등을 지었다. 이 모든 것이 국가를 위한 것이다. 경들은 다시 말하지 말라.”

 조선왕조실록의 졸기를 보면 사관의 평가는 대부분 엄격하다. 박자청도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박자청은) 덕이 적고 남을 시기하고 이기는 것을 좋아했다. 특이한 재능이 없었으나 토목 공사를 관장한 공로로 사졸(병사)에서 1품에 올랐다. 67세로 졸하다.” 

 박자청이 활동한 시기는 조선초기다. 국가의 제도가 만들어지고 건설하는 단계이다. 이것이 그의 능력이 더해져서 운명을 바꾼 것인지도 모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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