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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12) 경복궁 최고의 미인 경회루 ② 구종직과 단종, 명과 암 -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3-09 22:38:11
  • 기사수정 2019-03-11 12: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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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태종은 경회루를 외교적 목적으로 지었지만 다양한 용도로 활용했다. 후대 왕들도 태종과 다름이 없었다. 역사는 명과 암이 있다. 경회루도 그 범주 안에 있다. 

 조선은 농업국가로서 벼농사는 국가의 주요 산업이다. 벼농사는 필요할 때 비가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농사철에 비가 제 때에 내리지 않은 것은 조선시대 임금에겐 부덕의 소치였다. 왕은 기우제를 지내 비를 내리게 하는 것으로 자신의 부덕을 씻어야 했다. 

 경회루는 국가의 주요한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다. 경회루에서는 석척기우제를 행하였다. 석척기우제는 비를 관장하는 용으로 간주되는 도마뱀을 독안에 넣고 나뭇잎으로 덮는다. 푸른 옷을 입고 손과 발을 푸르게 염색한 동자 수십 명이 물에 젖은 버들가지로 독을 두드리면서 “비가 오면 놓아주겠다”고 외친다.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왔다. 비가 내릴 때까지 지내기 때문이다.    

 경회루에서 감추어진 실력이 보석으로 빛난 사람이 있다. 구종직이다. 구종직은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의 새내기 관리였다. 그는 숙직날 밤에 몰래 경회루에 들어가서 연못가를 어슬렁거리다가 수레를 타고 오는 임금(세종)과 맞닥뜨렸다. 


경회루 야경. 


세종이 경회루에 온 이유를 물었다. 구종직은 “경회루의 돌기둥과 연못이 천상의 선계라는 것을 듣고 몰래 구경하고 있습니다”라고 엎드려 조아렸다. 임금은 구종직에게 노래를 시킨다. 구종직은 목청을 길게 뽑아 한 곡조 불렀는데 임금이 “잘 부르는구나”라며 흡족해 하면서 “경전을 외울 수 있는가?”라고 하문한다. 구종직은 “(중국의 역사서) ‘춘추’를 외우겠습니다”하면서 한 권을 다 외웠다. 세종은 크게 기뻐하면서 그를 내보냈다. 그런데 다음날 입이 떡 벌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구종직을 부교리로 임명한 것이다. 교서관정자는 종9품이고 부교리는 종5품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무려 7단계를 특진시킨 것이다. 

 삼사(三司)가 돌아가면서 구종직의 특진을 반대했다. 세종은 반대하는 관리들을 모두 모아 놓고 춘추를 외우게 했으나 누구도 한 구절을 제대로 암송하지 못했다. 임금이 구종직에게 춘추 암송을 시켰더니 그는 다 외웠다. 다른 책을 물었는데 그것도 막힘이 없었다. 세종은 “너희들은 한 구절도 외울 수 없으면서 오히려 높은 벼슬에 앉았는데 구종직이 어찌 이 직무를 담당하지 못하겠는가. 모두 물러가라”고 하고는 구종직에게 직을 맡겼다.


 위의 내용은 <성호사설> <연려실기술> <오산설림초고>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책들에서 임금을 성종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필자가 세종으로 바꾸었다.

 그 연유는 이렇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구종직은 세종 26년(1444년) 과거에 급제해 3년 후 종6품인 영동현감으로 나간다. 조선의 과거에 급제해서 3년 만에 종6품의 관리로 임명되는 것은 정상적인 과정으로는 있을 수 없다. 별도의 진급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후 구종직은 세조와 성종 대에도 승승장구한다. 세조 2년 신하들에게 술자리를 베풀었다. 구종직도 참석했다. 구종직은 세조와 생각이 다른 내용을 매우 지루하게 술주정을 했다. 세조가 밖으로 끌어내게 한다. 구종직은 다음 날 자신의 무례에 대해 죄를 청한다. 세조는 그 죄를 묻기는커녕 구종직이 나이가 많음을 불쌍히 여긴다고 하면서 오히려 관작을 한 등급 더 올려주고 맡은 직무에 충실하라고 한다. 구종직은 죄를 빌러 갔다가 오히려 복덩이를 하나 더 받은 셈이다. 이후에도 그는 특진을 해서 공조판서, 중추부첨지사 등의 직을 맡았다. 성종 대에는 왕의 스승이 되어 활동하고 치사(致仕)를 신청했으나 받아주지 않는다. 치사는 70세가 되어 벼슬을 스스로 내놓고 물러나는 것을 일컫는다. 그만큼 신임이 두터웠던 것이다. 그는 일흔네 살까지 살았다.

 구종직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을 종합하면 위에 책들에서 기록한 임금은 성종이 아니라 세종으로 추론이 가능하다. 그리고 구종직을 <연려실기술>에서는 부교리, <오산설림초고>에서 대사간, <성호사설>에서는 홍문관수찬으로 삼았다고 기록돼 있다. 모두 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구종직이 특진을 한 것은 사실로 보이나 어떠한 직책과 품계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경회루는 외교의 무대가 된다. 조선의 제9대 성종은 유구국의 사신 내원리주(內原里主) 등을 경회루에서 맞이한다. 임금의 형인 월산대군 이정과 영의정 정창손 등도 배석했다. 내원리주는 유구국왕 상덕(尙德)의 국서를 가지고 왔다. 이 국서에는 조선을 부처님의 자손으로 인식하면서 지난 날 조선이 내려 준 진귀한 산물과 자신들이 요청한 사찰 이름을 어필(御筆)로 써 준 것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고 있다. 그리고 구리 동전, 솜과 명주, 목면을 더 내려주면 사찰을 완공할 수 있다는 바람이 들어있었다. 성종은 가람(伽藍)의 준공을 기원하면서 흉년으로 인해서 요청한 물품을 다 보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명주실 2백 필, 무명 4백 필, 인삼50 근, 소주 30 병 등 26품목의 하사품을 내린다.

조선 중기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 의하면 내원리주는 경회루를 본 소감을 통역에게 이야기 한다. “내가 조선에서 세 가지 장관을 보았소”라고 하면서 “경회루 돌기둥에 종횡으로 그림을 새겨서 나는 용의 그림자가 푸른 물결과 붉은 연꽃 사이에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것이 으뜸”이라고 했다.

 경회루의 돌기둥에 무늬를 새긴 것은 성종 5년이다. 그러나 정작 조선의 내부에서는 그 화려함을 우려하고 있었다. 사간원대사간 정괄은 “경회루 돌기둥에 새긴 구름과 용과 꽃들이 너무 화려하다고 합니다. 청컨대 새기지 말게 하여 검소한 덕을 보이소서”라고 상소를 올린다. 이 외에도 경회루 지붕에 푸른 기와를 얹고자 하는 중종과 사치를 경계해야 한다는 신하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의 궁궐과 제도에는 검소함을 우선적인 가치로 두었기 때문이다. 


 경회루는 역사적인 비극도 굽어보아야 했다. 어린 임금 단종은 왕을 상징하는 대보(大寶)를 경회루에서 영의정(수양대군)에게 준다. 단종이 대보를 물려주는 직접적인 계기는 혜빈 양씨, 상궁 박씨, 금성대군 이유, 한남군 이어, 영풍군 이전 등이 난을 일으켰을 때 자신은 어려서 나라 안팎의 일을 알지 못하고 난을 도모하는 싹이 종식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혜빈 양씨는 궁녀로 들어와서 세종의 빈이 되어 아들 셋을 낳고 단종이 어릴 때 보육을 맡았다. 상궁 박 씨는 아버지 문종이 단종에게 그가 세자시절에 붙여준 궁녀이다. 금성대군 이유는 세조의 동생이자 세종의 6번 째 아들이다. 한남군과 영풍군은 혜빈 양씨의 아들이다. 세종은 소헌왕후 심 씨 외에 5명의 여인에서 18남4녀 22명의 자녀를 두었다.

 

경회루는 국보 제 224호다. 경회루는 바람이 잦아들어서 또 하나의 누각이 연못에 드리워질 때 가장 아름답다. 평화로운 분위기를 빚어내고 그 풍경에 끌려서 관람객도 붐빈다. 

세조는 엎드려서 대보를 받고 단종이 부축해서 일으켰다고 기록돼 있다. 세조는 그 날 바로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백관을 거느리고 근정전에서 선위를 받고 즉위교서를 반포한다. 이날 밤 정인지를 영의정으로 임명한다. 세조는 대보를 받을 때의 공손한 자세와는 달리 선위, 즉위교서 반포, 인사 등 조치를 즉각 시행했다.  

 이 날 상서사에서 대보를 가져온 관리는 성삼문이다. 성삼문은 상서사의 부승지였기 때문이다. 이정형이 지은 <동각잡기>에 따르면 이 날 박팽년이 경회루 연못에 빠져 죽으려 하자 성삼문이 말리며 이렇게 말했다. “주상(단종)께서 상왕이 되시고 우리들이 죽지 않았으니, 아직도 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단종 복위운동의 도화선이다.

 세조 2년 6월1일 성삼문 등은 세조를 제거하기로 했다. 이 날 세조는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에게 연회를 베푼다. 어전(御殿)에서는 보통 무반 2명이 별운검이 되어 큰 칼을 차고 임금의 좌우에 시립한다. 이 날의 별운검은 성삼문과 뜻을 같이 하는 성승, 유응부, 박쟁이었다. 이들 별운검이 세조를 제거하기로 한 행동대원인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세조의 편이었다. 세조는 연회 장소의 내부가 좁다며 별운검을 없애라고 명하였다. 성삼문은 별운검을 없앨 수 없다고 다시 건의했으나 임금이 신숙주에게 내부를 살펴보게 하고 결국 별운검을 없앤다. 성삼문 등은 계획을 변경해서 세조가 백성의 농사를 살피려 나갈 때 거사하기로 했다.

 혁명은 순간의 판단으로 목숨을 가른다. 바로 다음날 성균사예 김질과 그의 장인 의정부우찬성 정창손이 “비밀히 아뢸 것이 있습니다” 면서 단종 복위운동을 세조에게 일러바친다. 성삼문 등의 2차 계획은 실행되지 못한 채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다. 이후 사육신, 단종 등 수많은 생명이 제 운명을 다하지 못했다. 


 경회루의 조용한 이면에는 역사의 파고가 있었다. 그 역사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어 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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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내원리주(內原里主)가 조선에서 본 세 가지 장관 첫째는 위에서 언급한 경회루 둘째는 영의정 정창손의 풍채가 뛰어나고 흰 수염이 늘어져 배까지 내려와서 조복을 빛나게 하는 것. 셋째는 예빈부정(禮賓副正)이숙문이 낮의 연회에서 큰 잔으로 무수히 술을 마셔도 취한 빛을 보이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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