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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6) 세종대왕, 집현전에 물어보다 ②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1-26 19:4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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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은 즉위 8년(1426) 집현전 학자들에게 재택근무를 실시한다. 집현전 출범 6년째였는데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이 그동안 격무로 독서에 전념할 겨를이 없었다고 판단했다. 세종은 집현전 부교리 권채와 그 해 과거시험에 입격한 신석견, 남수문 등을 불러서 “앞으로는 본전(사무실)에 출근하지 말고 오로지 집에서 글을 읽어라”고 명한다. 

한 가지 조건은 붙였다. 세 사람이 글을 읽는 규범은 변계량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변계량은 17살에 문과에 급제하고 대제학을 거의 20년 동안 한 문신으로 집현전 설립 초기에 집현전 관원들에게 시(詩)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집현전은 글을 부지런히 읽고 국정 자문에 대비하는 기관이다. 세종은 실제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한 집현전의 설립 목적을 다시 상기시킨 것이다. 


 

세종은 그 스스로도 어릴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다.

“(충녕은) 비록 몹시 춥고 더운 날씨라도 밤 새워 글을 읽고…….”

“책이 손에서 떠나지 않자 책을 감추게 하고…….” 

“글과 전적(典籍)을 밤낮으로 놓지 않아서 드디어 안질을 얻게 되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세종과 독서관련 내용이다. 세종은 어릴 때뿐만 아니라 왕이 되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책과 늘 가까이 한 군주인 세종은 집현전이 어떤 책을 읽고 능력을 키워서 국가의 자문에 대비하게 한 것일까?


 세종 3년 서적을 인쇄하는 주자소에 술 120병을 하사한다. 주자소는 태종 대 설치했는데 당시까지 책을 찍는 게 하루에 두어 장에 불과했다. 세종은 공조 참판 이천과 더불어 직접 팔을 걷어붙여 책 인쇄의 속도를 높이고자 했다. 주자소는 왕과 함께 일곱 달 동안 노력한 결과 글자 모양에 맞게 구리판을 주조하는 방법으로 바꾸어서 하루에 수십 장을 찍어 낼 수 있도록 성과를 올렸다. 책을 인쇄하는 속도가 획기적으로 개선된 것이다. 이후로도 세종은 주자소에 관심을 갖고 자주 술과 고기를 내려주었다. 세종은 책을 많이 편찬해서 널리 보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자소가 그 업무를 개선하고 처음으로 편찬에 착수한 책은 <자치통감강목>이다. <자치통감>은 북송의 사마광이 주(周)나라에서 후주(後周)까지 1362년간을 기록한 294권의 방대한 역사서이다. 세종의 관심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세종은 집현전의 재택근무를 실시하기 전에 예문 제학(藝文提學) 윤회에게 “집현전에 <사기(史記)>를 나누어 주어 읽게 하고자 한다”라고 밝혔다. 윤회는 반대를 한다. “옳지 않습니다. 경학(經學)이 우선이고, 사학(史學)은 그 다음입니다.” 세종은 경연관들에게 <사기(史記)> <좌전(左傳)><한서(漢書)><강목(綱目)><송감(宋鑑)>에 기록된 옛 일을 물으니 다 모른다고 한다면서 “(경학을 해서) 이치를 궁극히 밝히고 마음을 바르게 한 인물”을 아직 듣지 못하였다고 오히려 윤회를 퇴박한다. 세종이 위에서 언급한 다섯 종류의 책은 모두 중국의 역사 관련 서적이다. 세종은 이미 이런 역사책을 두루 섭렵했고 집현전도 읽기를 바랐던 것이다.

 세종은 곧 대제학 변계량을 불러서 사학(史學)을 같이 공부할 신하를 천거해 달라고 한다. 변계량은 집현전의 정인지와 설순, 그리고 인동현감 김빈 등 세 명을 추천했다. 세종은 김빈을 바로 집현전으로 발령을 내고 세 사람에게 <사기(史記)>를 나누어 주어 읽게 한다. 세종은 이 외에도 당나라의 역사서인 <당감(唐鑑)> 을 집현전으로 하여금 직접 쓰게 했다. 세종은 사물의 이치를 밝히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는 경학보다 역사책이 도움이 된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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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역사를 소중히 생각한 사실을 입증하는 또 다른 기록을 보자. 

세종 6년(1424) 사관이 기록한 사초 처리 문제를 신하들과 논의하면서 세종은 자신의 초기 재위 4년은 태종실록에 기록하는 것이 어떠냐고 신하들에게 묻는다. 세종은 이 4년 동안 국정은 모두 부왕인 태종에게 보고하고 시행해서 자신의 뜻대로 한 것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역사를 정확하게 기록하겠다는 세종의 의지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을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린 것도 세종이다. 사관의 근무 편의를 위해 승정원 곁에 한 간 규모의 거처도 마련해 주었다. 세종은 신하들이 왕에게 올린 보고서나 자신이 한 말을 모두 사관이 기록하게 한 후에 각 부서로 전달하게 했다. 세종은 국가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록하려 했다. 


 세종은 집현전에 역사책만을 읽으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세종은 집현전 출신이자 경연관인 권채와 독서 토론을 하면서 경전만 읽을 게 아니라 시(詩)와 문집도 읽어야 한다고 했다. 두보(杜甫)의 시나 당나라 학자인 한유와 유종원의 글도 읽으라고 조언을 한다. 토속적인 제사나 신화적인 요소가 담겨 있는 <초사(楚辭)>나 유학 경전인 <성리대전(性理大全)> <사서대전(四書大全)>도 집현전에 나누어 준다.  


 책을 늘 손에서 떼지 않은 세종의 눈높이에 집현전이 따라가기는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세종은 집현전의 책읽기에 대해서 아예 강제성을 띠는 조치를 취한다. 세종은 집현전이 읽어야 할 책을 정해주고 시험도 치르게 한다. 세종이 집현전에 읽어야 할 책으로 정해준 것은 경·사·자·집(經·史·子·集)이다. 경(經)은 논어· 맹자· 시경· 주역 등 경전이고, 사(史)는 사기· 춘추 등 역사서이며, 자(子)는 주자· 장자 등 좀 더 범위가 넓은 책이며, 집(集)은 개인의 문집이다. 세종 대의 기준으로 보면 거의 모든 분야가 망라된 책이다. 세종이 평생 동안 손에서 놓지 않으며 읽은 책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집현전은 자신의 직책에 따라 책을 읽고 열흘에 한 번 시험을 봐야 했다. 1등의 답안지는 세종에게 보고됐다. 또한 각자가 읽은 것을 매일 기록해서 월말에 제출해야 했다. 그 대신 집현전의 출퇴근은 사헌부에서 규찰하지 못하도록 했다. 세종은 집현전이 책 읽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막아주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집현전’을 검색하면 연관단어로 ‘옛 제도를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는 세종의 지시가 자주 등장한다. 세종은 국가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역사와 성현의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고, 정책의 정확성과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했다. 세종이 집현전에 재택근무를 실시하고 책읽기를 채근한 이유다. ‘옛 제도를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는 세종의 물음에 독서로 무장된 집현전이 답을 내 놓을 차례다.(계속)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입격(入格)과 급제(及第) : 조선의 과거제도에서 일반적으로 소과(小科)합격자를 입격, 대과(大科)합격자를 급제라고 한다. 입격자는 학문의 길에 들어섰고, 급제자는 벼슬길에 들어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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