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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5) 세종대왕, 집현전에 물어보다 ①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1-19 20:01:05
  • 기사수정 2019-01-24 22:3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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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에 아주 위엄과 풍모를 갖춘 건물이 있다. 수정전(修政殿)이다. 궁궐 건물 이름의 ‘殿’은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 교태전(交泰殿)처럼 왕과 왕비의 건물에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수정전은 왕과 왕비의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에도 ‘殿’을 붙였으니 위엄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큰 특징은 수정전이 월대(月臺)를 갖고 있는 점이다. 월대는 건물 앞에 돌로 쌓은 기단으로 큰 행사 등을 치를 수 있다. 월대는 왕과 왕비 관련 건물에 있고 일반적인 전각에는 없다. 수정전은 왕의 건물에 버금가는 월대도 갖고 있으니 풍모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殿)과 월대(月臺)를 갖추고 있는 수정전은 조선 초기 집현전(集賢殿) 터다. 

 수정전(사진)은 고종 대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지은 것이다. 수정전이 집현전 터라는 기록이 아직 나온 게 없다. 그럼에도 수정전을 집현전 터라고 하는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에 집현전은 궁궐 안에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한 학자들의 연구 결과이다. 수정전(집현전 터)은 경회루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집현전’을 검색하면 987건이 나온다. 이것의 대부분은 세종 대에 집중되어 있다. 그만큼 집현전은 세종대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집현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제2대 정종 대이다. 대사헌 조박이 집현전은 그 이름만 있고 실상이 없어서 옛 제도를 회복하고 많은 서적을 비치해야 한다고 보고한다.  왕이 허락했다. 태종 대에서도 사헌부와 사간원은 해를 달리해서 상소를 올린다. 집현전을 개설해서 유사(儒士)를 뽑아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문풍(文風)을 진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상소와 왕의 허락, 또 다른 두 번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태종 대까지 집현전은 그 실체가 없는 명분뿐이었다.  

 집현전을 본격적으로 활용한 것은 세종 대부터다. 세종은 왕위에 오른 후 바로 이 문풍을 진흥하는 조치를 취한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집현전 설립의 지지부진함을 나무라면서 10여 명의 유사를 뽑아 매일 강론을 하게한다. 집현전의 시초다. 세종은 이듬해 1420년 집현전의 인원수를 정하고 관원을 임명한다.

 

집현전은 약 30여 명의 문관으로 출발한다. 이 중 20여 명은 경연관(經筵官)을 겸임하게 한다. 경연관은 왕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왕을 자주 만날 수 있는 자리다. 세종은 집현전에 노비도 붙여주고 비로소 관청을 궁중에 두게 한다. 집현전의 위상이 어느 정도의 높이에서 출발했는지 짐작케 한다. 

 그 목표도 명확히 했다. 집현전은 문관 가운데서 재주와 행실이 좋은 젊은 사람 위주로 뽑아서 오로지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일삼고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게 했다. 

 집현전의 문이 활짝 열렸다. 집현전 관원들에게 시(詩) 짓기를 시험하고, 여덟 살이 된 원자(제5대 문종)를 가르치게 하고, 세자 책봉에 대비한 연습을 시키는 임무도 주어졌다. 세종은 주자소에서 찍어 낸 <자치통감강목>의 잘못된 부분을 집현전으로 하여금 교정도 보게 했다. 이것은 3년이나 걸리는 꽤 힘든 작업이었다. <자치통감>은 294권이나 되는 중국의 방대한 역사서다.

 집현전은 왕실의 종친도 가르쳤다. 태종의 사위이자 부마인 조선(趙璿)이 집현전에서 글을 배웠다. 일종의 특혜다. 다행히도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태종이 알게 됐다. 태종은 특정인을 총애하는 것은 예부터 경계해야 할 일로서 옳지 못하다고 하면서 조선을 집현전에서 배우지 못하게 한다. 태종 덕택에 집현전의 업무가 덜어졌다.


 집현전은 또 다른 왕실의 일에도 참여한다. 신영궁주 신 씨가 돌아가신 태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법화경>을 금자(金字)로 베끼고자 했다. 신 씨는 태종의 정비인 원경왕후가 돌아가신 후 궁 안의 일이나 태종의 병간호를 했다. 원경왕후가 낳은 4남4녀보다 더 많은 3남 7녀의 자녀를 둔 태종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여인이다. <법화경>을 베끼는 것은 유교국가의 이념과도 맞지 않은 일로서 신하들이 반대했다. 세종도 개인적으로는 신하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자신의 부왕이자 남편의 명복을 빌겠다는 신 씨의 간절함을 이길 수 없었다. 세종은 집현전 부제학 신장(申檣)을 참여케 해서 <법화경>을 정서하도록 한다.

 필자가 이 글을 쓰고 궁궐을 안내 할 수 있는 것은 ‘사관’의 꼼꼼한 기록으로 남아있는 <조선왕조실록>덕택이다.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에 세계 기록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 사관은 한 명이었다. 세종은 중국의 역사서가 상세하게 기록돼 있는데 비해서 고려사가 너무 간략하게 기록돼 있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또한, 세종은 사관 혼자서 국가의 일을 다 기록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세종은 궁궐 내에 관청이 있는 집현전에 사관의 업무도 맡겼다. 집현전 관원 5명은 약 2년 동안 본업 외에 사관의 일도 겸직했다. 


 세종은 일본국 사신이 가지고 있는 그림에 글을 짓도록 집현전에 지시했다. 그 중 한 편의 시를 감상해 보자. 집현전 부제학 신장의 매창시(梅窓詩)다.

“옥 같은 고운 송이 눈[雪]을 뚫고 방긋 웃네

맑고 맑은 네 모습은 꽃 가운데 으뜸이다

저무는 해 차가운 마음 뉘라서 알아줄까

오직 높으신 그 임만이 꼭 오셔야 하리” 

 

이처럼 집현전의 업무는 전방위적이었다. 집현전의 설립 목적인 ‘오로지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일삼고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는’ 모습은 집현전 설립 초기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때마침 세종대왕이 덜컥 자충수를 둔다. 세종은 지방 수령 임기 3년을 6년으로 바꾼다. 이것은 인사담당 부서인 이조의 건의로 시작됐다. 세종도 “명나라는 오로지 관직을 오랫동안 맡기므로 천하를 유지한다”는 평소 소신을 갖고 있었다. 인사담당부서의 건의와 세종의 소신이 맞아 떨어진 합작품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수령 임기 6년은 태종도 시행하려는 제도였다.


이 정책은 정부의 거의 모든 부서의 반대에 부딪쳤다. 호조, 형조, 공조,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왕의 결정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유가 있었다. 당시의 각 도의 수령은 약 330명이었다. 조선 초기는 8도체제였다. 전국적으로 수령은 대략 2,600여 명이다. 서울에서 근무하는 관리들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유도 그럴싸했다. 집안의 가장이 오랫동안 집을 비우면 부모 봉양이나 자녀 결혼에 어려움이 있으며, 수령의 임기가 장기간 보장되면 나태해지고, 세금 거두는 민폐가 더 심할 것이라는 등 효사상과 백성의 어려움을 주장했다. 세종은 “내가 여러분의 뜻을 아름답게 여겨 다 자세히 보았노라”고 하면서도 그 주장에는 끄떡도 안 했다. 여러 신하들은 왕의 완강한 태도에 “수령 임기 6년은 혁파할 수 없다”고 포기했다.

 

며칠 후 집현전이 나섰다. 집현전 부제학 신장 등 13인이 글을 올렸다. 세종은 앞서 상소를 올린 부서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세종대왕은 “너희들은 역사를 많이 공부하니 그 근거를 대라”고 만나서 토론을 한 것이다. 집현전은 당나라와 송나라의 제도와 우리의 옛 제도 3년에 대해서 설명했다. 

세종은 집현전의 의견을 들은 후, “만약 너희들이 아니면 누가 감히 앞서 진언하였던 것을 다시 말하겠느냐”고 하면서 자신의 뜻을 다시 설명한다. 세종과 집현전이 의견을 사전에 조율하지 않고 엇박자를 낸 예이다. 세종은 차츰 집현전으로 하여금 옛 제도를 사전에 조사하게 한 후 정책을 결정한다. (계속)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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