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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1-12 22:41:55
  • 수정 2019-01-13 10: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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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왕의 취임식은 조촐했고, 대부분은 눈물바다였다. 국왕의 이임식도 아니고 즉위식이 눈물바다였다니 너무나 뚱딴지로 들릴지도 모른다. 

조선은 505년 지속된 나라다.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건국한 이래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까지를 보면 그렇다. 이 기간에 왕으로 재위한 분은 고종을 포함해서 26명이다. 고종은 조선의 왕과 대한제국의 황제를 동시에 역임했다. 순종을 조선의 27대 왕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순종은 엄연히 대한제국의 황제이다. 

 왕조국가 조선에서 왕이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즉위식이 왜 조촐하고 눈물바다인지 이해할 수 있다. 조선에서 왕이 되는 방법은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태조의 개국군주, 선왕이 생존해서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선위(禪位), 정치를 올바르게 하지 못한 왕을 쫒아내고 정권을 잡은 반정(反正), 그리고 사위(嗣位)가 있다. 사(嗣)는 이을 사로 선왕(先王)이 돌아가시면 그 왕위를 이어받는 것을 말한다. 세자를 정하는 일을 후사(後嗣)를 정한다고 한다.

창업 군주 태조의 즉위식을 보자. <조선왕조실록>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수창궁은 고려왕조 개성에 있는 궁궐이다. 그 날의 기록을 보면 배극렴 등 대소신하들이 국새를 받들고 태조의 저택으로 찾아간다. 태조는 문을 닫고 신하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밖에서 기다리던 신하들이 저녁 무렵 문을 밀치고 들어가서 국새를 마루 위에 놓는다.  태조는 국새를 보고 두려워서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윽고 첫 말을 뗀다. 

“제왕은 천명이 있어야 한다. 나는 덕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 

이 말을 진실이라고 믿고 신하들이 물러나겠는가. 다시 간절하게 권하자 태조는 마지못한 듯 수창궁으로 간다. 국왕 자리에 오르겠다는 의사표시다. 

신하들은 수창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태조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殿)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어좌에 오르지 않은 채 서서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 그리고 즉위 연설을 했다.

“내가 수상(문하시중)에 오를 때도 두려웠다. 모든 신하들은 마음과 힘을 합하여 덕이 부족한 나를 보좌해달라.”

 태조는 국새를 받거나 즉위 연설을 할 때 두려운 마음으로 임했다. 화려한 즉위식은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다. 즉위식을 체계적으로 할 ‘준비위원회’나 즐거움을 고조시킬 음악이나 춤, 축하사절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 다음 선위(禪位)로 오른 왕을 보자. 

 태조가 제2대 정종에게 왕위를 물러줄 때 내세운 것은 자신의 병이었다. 왕위를 물려주고 마음 편히 병을 치료해서 여생을 보내고자 했다. 정종 즉위 열흘 전에 일어났던 제1차 왕자의 난 때도 태조는 병중이었다. 그 때 자신이 선택한 세자와 그 형이 자신의 또 다른 자식들에 의해서 목숨을 잃었다. 태조는 육체의 병에 더해서 마음의 병도 깊었으리라.

 이러한 가운데 정종은 양위교서와 전국보(傳國寶·옥새)를 부왕으로부터 받고 경복궁 근정전에서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자신의 이름 방과(芳果)를 경(曔)으로 고치고 태조에게 상왕(上王)의 존호를 올렸다. 정종의 즉위식은 단출했다. 

 정종으로부터 선위 받은 제3대 태종은 개성 수창궁에서 즉위했다. 태종의 즉위식 날 일정은 빼곡했다. 우선, 즉위교서와 사면령을 반포하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태조가 오대산에서 돌아오니 마중을 갔고 정종에게 문안을 갔다. 이 날은 동짓날이어서 백관 하례도 받았다. 

신하들의 보고도 받았다. 사헌부에서 올바른 정치를 위한 11조목을 보고했다. 맹사성은 “임금은 매일 공부해야 한다”면서 공평한 인사등용을 주문했다. 태종은 자신의 뜻도 하달했다. 민생문제를 보고하게 했고, 지역의 관리들이 서울에 와서 축하 인사를 못하게 했으며, 관복은 비단이 아니라 명주나 베로 짓게 했다. 귀신과 불사(佛事)의 일도 논의했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잘 가르쳐준 스승에게 음식도 대접했다. 일을 마치고 본궁으로 돌아온 것은 밤2경(9시~11시)이었다. 태종은 즉위식 날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하루를 보낸 것이다.

 제4대 세종은 얼떨결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태종은 신하들과 논의 없이 독단으로 세자(세종)에게 선위하겠다고 했다. 이에 놀란 신하들이 선위를 번복시키려고 세종의 즉위 하루 전까지 일제히 상소를 올렸다. 그 선위를 번복시키려는 통곡소리가 궁궐의 뜰을 진동했다고 했다. 세종이 ‘얼씨구나!’ 하는 마음으로 즉위를 할 수 있었겠는가. 즉위식은 즉위 교서를 발표하는 것으로 그쳤다. 다른 왕의 선위도 이와 비슷했다. 선위는 있는 듯 없는 듯 이루어졌다.


창덕궁 인정문 


 조선의 왕 대부분은 사위(嗣位)를 통해서 즉위한다. 사위는 선왕이 승하한 6일 후 왕위에 오르는 것이다. 자신이 왕위에 오를 때 선왕의 주검이 궁궐에 안치돼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과정이 잘 기록돼 있다. 현종과 숙종이 사위에 오르는 과정을 재구성해 보자. 왕세자가 인정문에 나아가서 동쪽이나 서쪽을 보고 선다. ‘군주는 남면한다’는 사상이 있다. 군주는 신하들이 앉아 있는 남쪽으로 얼굴을 향해서 정사를 본다는 의미이다. 즉 세자가 동쪽이나 서쪽으로 보고 서 있다는 것은 아직 자신이 왕이 아니라는 의사 표시다. 

 먼저 도승지가 꿇어앉아서 어좌에 오를 것을 청한다. 왕세자는 차마 어좌에 오르지 못하고 소리 내어 슬피 운다. 다음으로 예조 판서가 꿇어앉아서 다시 어좌에 오르기를 청한다. 그래도 왕세자는 따르지 않는다. 세자에게 삼 세 번은 권해야 하는가 보다. 마지막으로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나와 두세 번 어좌에 오를 것을 청하자 그제야 비로소 어좌에 올라 남쪽을 향하여 선다.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상중의 임시 거처로 돌아가는 것으로 즉위식은 끝난다. 이 날의 풍경은 우는 것이 끊어지지 않았으며 통곡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고 기록돼 있다. 즉위식에서 연상되는 화려한 장식물이나 풍악은 없다. 눈물바다만 가득했던 것이다.

 조선의 국왕이 가장 많은 즉위식을 올린 곳은 창덕궁 인정문이다.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의 넓은 뜰이 아니다.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식이 많았던 것은 조선 중·후기 대부분의 왕이 창덕궁에서 정사를 보고 거기서 승하했기 때문이다. 

 경복궁 근정문이나 창덕궁 인정문을 들어갈 때 이 문 앞에서 왕의 즉위식이 이루어졌음을 떠 올려 보자. 왕세자가 최고권력의 자리를 앞에 두고 짐짓 머뭇거리며 슬피 통곡하는 장면과 덩달아 같이 우는 신하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조선 국왕의 즉위 

개국(開國1) : 태조

선위(禪位5) : 정종· 태종· 세종· 세조· 예종

반정(反正2) : 중종· 인조

사위(嗣位18): 문종· 단종· 성종· 연산군· 인종· 명종· 선조· 광해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 사헌부에서 올린 치도(治道)11조목 

1.효도와 형제 우애를 두텁게 하라

2.간언을 받아들이라

3.기강을 세우라

4.상벌을 밝게하라

5.재물을 절약하라

6.사냥을 경계하라

7.충직한 사람을 등용하라

8.아첨하는 사람을 추방하라

9.검소함을 숭상하라

10.지역인재를 중하게 여겨라

11.죄를 가볍게 용서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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