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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3) 흥례문, 국가비상훈련을 하다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게 된 궁궐
  • 기사등록 2019-01-06 07:54:42
  • 기사수정 2019-01-06 18:2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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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철 광화문역에서 경복궁으로 걸어가면 기분이 참으로 좋다. 봉긋 솟아오른 백악산 아래 펼쳐진 경복궁의 숨결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정문인 광화문을 지나 흥례문, 근정문으로 들어서면 위엄 있는 근정전이 정면으로 다가선다. 

이러한 장면은 우리에겐 소소한 행복이다. 우리 궁궐에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뭐 대수냐” 하면서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과연 그런가?

 

경복궁은 태조4년 1395년에 지었다. 그로부터 624년이 지난 오늘 평범한 시민이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을 통과해서 근정전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또 궁궐 구석구석 볼 수 있게 된 것은 경복궁의 오랜 역사에 비추면 아주 짧은 시기에 불과하다. 일반인에게 이 세 문을 통과해서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길은 오랫동안 허락되지 않았다. 

경복궁은 임금, 왕비, 세자, 대비 등 왕실의 주요 인물들의 생활공간이자 나라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정치공간이다. 그 지엄한 공간에는 안전과 비밀 유지가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 궁궐을 지켜야 했고 그 수비는 군인들의 몫이었다. 조선에서 궁궐을 출입하기 위해서는 출입증이나 사전 허가가 있어야 했다.



 태조 때 의안대군 이화가 궁에 들어가려 했으나 제지당했다. 왕의 사전 허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의안대군은 왕의 이복동생이자 태조를 도운 개국 공신이다. 그는 자신의 위세를 과시해서 들어가고자 했다. 청와대 경호실에 해당하는 입직군사를 발로 차서 얼굴에 상처를 입혔다. 요새 말로 소위 슈퍼 갑질을 한 것이다. 이 사실을 태조가 알았다. 태조는 갑질을 한 동생을 불러서 야단을 쳤다. 

“명령에 따라서 궁궐 수비를 엄격히 한 군인은 진실로 옳고, 너는 잘못했다.” 왕의 동생이고 개국 공신이었지만 궁궐 출입은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궁궐 수비의 원칙을 지킨 이 군인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내시 출신으로 군인이 되어 오늘날 건설부장관에 해당하는 공조판서까지 오른다. 경복궁의 경회루나 창덕궁의 여러 전각 등 조선 초기 중요한 건설이 그의 손에서 이루어진다. 이름은 박자청이다. 

 그 후 태종도 문을 파수하는 금법(禁法)을 엄하게 할 것을 지시했다. 특히 부녀자들의 출입은 불가했다. 그 이유는 궁중의 난이 환시(宦寺)와 부녀들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태종 11년(1411) 처음으로 궁궐출입증인 인패(印牌)를 발급했다.


세종 때에는 보다 구체적이다. 세종도 궁궐 출입증을 발급했는데 신부(信符)라고 했다. 그 신부를 발행하는 부서는 궁궐 수비를 담당하는 병조였다. 7,233명에게 발급했다. 가장 많은 부서는 병조로 4,937명이고, 가장 적은 부서는 형조로 17명이었다. 궁궐 출입은 신부가 있어야 했다. 신부(信符)가 있어도 궁궐에 근무하는 궁인들은 반드시 승정원에 알리고 나가게 했고, 자고 들어오지는 못하게 했다. 궁궐의 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러한 궁궐 출입은 후대의 왕까지 엄격하게 이어졌다. 

 

그 후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불 타 고종 시절 중건 될 때까지 약 270여 년간 폐허로 방치됐다. 궁궐을 가고 싶어도 잡초만 무성한 장소로 퇴락한 것이다. 고종 때 다시 지어졌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사용하지 못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궁궐의 주인인 왕이 경복궁을 떠나버렸다.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채 덩그러니 남았다. 

그 빈 공간을 조선총독부가 헤집고 들어왔다. 현재의 흥례문 앞터다. 흥례문은 뜯기는 수모를 당하고 다시 복원된다. 경복궁은 이렇게 역사의 여러 질곡을 경험했다.


이제 우리는 어깨를 펴고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으로 들어가서 근정전을 정면으로 바라 볼 수 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지나면 탁 트인 공간이 나온다. 조선총독부는 사라졌고 복원된 흥례문과 넓은 뜰이 우리를 맞이한다. 조선시대, 이 넓은 뜰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그 중 세조1년(1455) 11월에 실시한 취각령(吹角令), 즉 국가비상훈련을 보자.

임금이 흥례문에 도착하면 비상훈련은 시작된다. 종친, 신하, 갑옷을 입은 군사들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임금의 명령이 하달되면 취라치(吹螺赤)가 광화문에 올라가서 소라와 대각을 불고 후원에서 로켓추진 화살인 신기전을 쏜다. 이것을 신호로 해서 백악산, 남산, 흥인문, 성균관 북쪽과 인왕산 고개, 돈의문 등 궁궐 밖 여섯 곳에서 모두 대각과 신기전으로 호응을 한다. 

그러면 임금은 자신의 명령을 직접 전하는 선전표신으로 영의정, 병조판서 등 주요 관계자들에게 군사배치 상황을 논의하게 한다. 병조나 군사관련 부서, 지역에서 올라온 각 부대도 광화문 앞에서 명령을 기다린다. 별도로 동대문까지 행진하는 부대도 있었다. 이 부대는 종루 남쪽에 대기하고 있었다. 비상훈련이 궁궐 주변에서만 옹기종기 모여서 실시되는 게 아니라 시가행진을 해서 백성들에게도 알렸음을 알 수 있다.


 문관도 각 부서의 1명을 제외하고 모두 참여했다. 평상시 근무복 차림으로 병장기를 가지고 회의실에 모여서 명령을 기다렸다. 임금과 종친, 문·무관, 서울과 지역 등 모두가 동원된 국가비상훈련이었던 것이다. 취각령은 해가 저물 때까지 했다고 기록돼 있다.


 취각령은 조선 전기 세종 때까지는 자주 실시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 이 날의 기록이 취각령으로는 마지막으로 검색된다. 나라를 세우고 국가를 튼튼히 해야겠다는 조선 초기의 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조선 초기에는 주변국의 사람들이 항복해온 기록이 여럿 보인다. 아마 굳건한 국방이 그 역할을 했으리라.


=왕현철 전 KBS PD, 우리궁궐지킴이


*흥례문(興禮門)

 흥례문은 원래 클 홍(弘)을 쓰서 홍례문이었다. 고종3년(1866)에 이름을 바꾼다. 이유는 홍자가 청나라의 건륭제 이름이 홍력(弘歷)이어서 황제 이름을 피휘(避諱)했기 때문이다. 피휘는 황제나 임금의 이름을 피하여 쓰는 것이다. 

조선 왕의 이름은 대부분 외 자로 일반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를 쓴다. 태조는 단(旦), 성종은 혈(娎), 영조는 금(昑), 정조는 산(祘)이다. 그 이유는 관리나 일반 백성들이 임금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고 문서에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한자로 쓰면 곤란한 일이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이도(李祹)이다. 왕의 이름과 발음이 같아도 바꾸었다. 개성유휴 이도분(李都芬)은 이사분(李思芬), 충청도의 이도역(利道驛)은 이인역(利仁驛)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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