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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궁궐이야기 (1) 광화문, 대자보로 활용되다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게 된 경복궁
  • 기사등록 2018-12-23 18:27:30
  • 기사수정 2019-01-09 18: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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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 4년 1395년 9월에 종묘와 더불어 새 궁궐이 준공됐다. 동문은 건춘문, 서문은 영추문, 남문은 광화문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이 기록에는 이론이 있다. 

광화문 이름을 지은 것은 세종 8년 때다. 집현전 수찬에게 명해서 궁궐의 문과 다리의 이름을 정하게 하고, 그때 근정전 앞 셋째를 광화라고 했다.

 태조 대 광화문은 다락 3칸의 상, 하층으로 돼 있고 종과 북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알리게 했다. 

 세종은 궁궐에 백성들의 출입을 금했다. 광화문으로 부녀자들의 출입을 금했고, 영제교와 근정전 뜰에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세종 20년 문과시험은 근정전에서 하고 무과 시험은 광화문 밖에서 행했다. 광화문 밖의 시험장은 중종 때 이전된다. 말을 달리며 재주를 겨룰 만한 곳이 아니라고 해서 모화관에서 치르는 것으로 바뀌었다.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 소장 광화문 전경 사진(1893년 9월 이전) 자료=문화재청


세종 대에는 정부 정책을 알리는 데 광화문 밖 담장을 활용했다. 일종의 대자보 역할이다.  세종은 사헌부에서 건의한 금령의 조문을 요약해서 광화문 밖에 내 걸었다. 

그 조문이 43개나 된다. 내용을 보면 관청의 조회가 끝날 때 옷을 터는 것을 금지하고, 대소의 남녀를 불문하고 황색 옷을 금지하며, 대소 인원 및 공ㆍ상인(工商人)의 가죽신 신는 것을 금지하며, 부녀자가 사찰(寺刹)에 가는 것이나 중이 과부집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성내에서 풍악을 울리며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 상인(常人)들이 성내에서 말을 타는 것도 금지했다. 양반이나 백성들이 혼인할 때 예절에 대한 규칙도 게시했다. 


세조는 광화문 밖에서 중전과 함께 화포나 활쏘기를 구경하였다. 세조는 백성들과 소통을 하기 위해서 광화문 앞 광장을 이용했다. 세조는 주서와 사관에게 "광화문 밖에 직접 나가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만나 말 할 기회를 주라"고 지시했다. 백성들은 제비를 뽑아 자신들의 억울함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정치의 잘잘못을 듣기도 했다. 이는 경외(京外)의 한량(閑良)과 공사 천례(公私賤隷)들이 할 수 있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백성들은 진시(辰時,아침 7~9시)에 가서 줄을 서고 제비에 뽑혀야만 했다. 이를 탐주(探籌)라 했다. 이 용어는 사헌부 대사헌 양성지의 상소문에 격고(擊鼓)와 함께 나오는 단어다.  


이 대자보는 중종 대에도 등장한다. 세종대 광화문 담장이 정부정책을 알리는 대자보 역할을 한 반면 중종 대에는 일반 백성이 자신들의 의견을 알리는 대자보로 활용됐다.

 중종 6년 4월에 어떤 사람이 광화문 담장에 아래와 같이 방을 붙였다. “김근사(金謹思)ㆍ성운(成雲)ㆍ김굉(金硡)ㆍ이빈(李蘋)은 오늘날의 사흉(四凶)이다. 김근사는 연산군의 총애하는 신하로서 연산군이 좋아했던 기생을 첩으로 삼았으니 신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성운은 눈을 내려 뜨지 않고 조정을 경멸하며, 부정한 재물로 큰 집을 지었다. 김굉은 본래 그 집안에 음란한 기풍이 크게 행했으니, 두 기생을 첩으로 삼고 방종 음란을 마음대로 한다. 이빈은 거상(居喪) 중에 내를 막아 논을 풀었으니 이것은 온 나라의 중론(衆論)이다”라는 내용이었다. 

그 다음날도 “구수영ㆍ권균ㆍ한순ㆍ강혼은 폐주의 행신(幸臣, 총애하는 신하)이었다”라는 대자보가 붙었다. 안타깝게도 대자보는 그것으로서 그친다. 

조정에서 대자보에 대해 논의한 자료는 없다. 다만 대자보에 이름을 올린 김근사는 다시 실록에 이름이 오른다. 대자보에 거론된 뒤 1년 4개월이 지난 다음 해 8월 달에 우부승지로 임명됐다. 이후 김근사는 실록에 자주 등장하고 영의정까지 오른다. 

사관은 그의 죽음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 졸기를 썼다. 사관의 평을 보자. “김 근사는 외모는 순박하고 충실한 듯하나 마음은 음흉하였다. 김안로(金安老)와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영의정이 되었고 매사를 안로가 선창하면 근사는 호응하여 사류(士類)를 물리치는 데 모든 간계를 다하였다. 안로가 패하자 경상도 하동(河東)으로 쫓겨났다가 금년 6월 25일에 병사하였다.” 비판 일색이다. 

성운은 2개월 후 장령으로 발령이 나고 그 후 대사헌, 병조판서까지 이름을 올린다. 경상도 감사로 가서 죽었는데, 중종은 그의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했다. 사망 다음날 예정되었던 과거시험과 조회를 연기하고 시장도 철시하는 등 이틀간의 애도 기간을 가졌다.

김굉은 그 해 다음달 5월에 시독관(侍讀官)으로서 임금을 강의하는 자리에 이름이 나온다. 이빈은 그 다음해 5월 사헌부 지평으로 실록에 등장한다. 

광화문 대자보에 등장한 이름들이 이처럼 중종 대에 대부분 출세한다. 영의정이 되고, 병조판서, 시독관이 된다. 대자보의 신빙성이 그렇게 높지 않은 것 같다. 대자보가 익명이었음으로 공론화가 되지 않은 것 같다.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전 KBS PD   



*광화(光化)문의 이름 


태조실록 1395년 9월29일에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9일 후 같은 태조실록(1395년 10월7일)에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이 새 궁궐의 여러 전각 이름을 지어 의의를 써서 올렸다. 여기에서 궁궐 이름이 정해졌다. 경복궁의 이름도 이 때 탄생했다. 남쪽 문은 정문(正門)이라고 했다. 오늘날의 광화문이다. 그러니까 처음 경복궁을 지었을 때 광화문은 정문으로만 불렀다. 광화문의 이름은 세종 8년, 세종이 집현전 수찬에게 명해서 경복궁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정하게 했는데, 근정전 앞 셋째 문을 광화라고 했다. 광화문 이름은 세종 대에 정해진 것이다. 그런데도 그보다 앞 시기인 태조실록에 광화문이 등장하는 이유는 현존하는 태조실록이 세종 30년(1448년) 6월에 찬집된 것이어서 그렇다. 후대에 태조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세종 시대 당시에 쓰던 '광화문'이란 이름을 그대로 썼기 때문이다. 


*광화의 뜻


1. 서경 제1편 우서(虞書) 제1요전1장

2. : 光被四表 格于上下(빛을 온 세상에 펴시니 하늘과 땅에 이르렀다.

2. 위서 <함양왕희전>

陛下 聖過堯舜, 光化中原 (폐하의 성스러움은 요 순 임금보다 뛰어나고 중원을 광화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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